하룻밤의 지식여행 다음 책이다. 니체(로런스 게인)이다. 작년에 문화센터에서 니체 읽기에 참여 했었다. 기억에 남는것은 디오니소스적, 포스트모더니즘만 기억하고 있다. 니체의 책들은 아주 광범위한 내용을 압축하여 표현 한다. 아포리즘 스파일로 철학 배경 지식이 부족한 나에게는 이해가 어려운 책이다. 이책은 니체의 영향 준 철학자와 삶을 간단히 소개하고 니체의 저서에 담겨 있는 철학을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니체의 철학이 영향을 미친 현대 철학자 및 철학사상을 언급한다. 많은 내용을 소제목 위주로 설명하다 보니 전체적인 연관성과 맥락 이해는 어려웠다.

철학내용 언급위주로 발췌정리 하였다.     

니체의 첫번째 책 비극의 탄생은 합리적-철학적인 담론과 창조적-예술적 표현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관습을 무너뜨렸다. 인간의 문화와 사상에서 이성적인 경험과 미적인 경험을 뚜렷이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성과 현실, 빛을 상징하는 아폴론과 대비되는 술과 환락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이야기 한다.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언어와 신분 따위는 집어던지고 활홀경에 빠져 춤을 춘다. 음악과 술이 그들의 수단이라면 '신비한 집단적 활홀경'은 그들의 목적이다. 주관이 도취의 상태로 고양되어 몰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음악에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정신은 태어나는 것은 모두 자신의 고통스러운 소멸에 직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그리스의 비극 정신이 당시 바그너의 가극에서 부활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디오니소스의 정신이 억압을 받으면서 우리는 감각을 통한 직관과 정신적 진리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문화가 우리의 가장 높은 목표라면 이성만 가지고 현실의 근본 성격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적 이론들은 어떻게 될까 ? 물론 형이상학적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의 절대적인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반발할 여지가 없으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인간의 머리를 통해 보며, 따라서 이머리를 잘라낼 수 없다. 머리를 잘라내면 세상에 과연 무엇이 남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라고 묻지 말고 "우리가 무엇을 아는게 좋을까?"라고 물어야 한다.

도덕적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이 있을뿐..

덕이 있는 사람은(곧 좋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칭송을 받는 것은 그가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순종, 순결, 공정, 근면 따위)은 덕이 있는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네게 덕이 있다면 .. 너는 그 덕의 희생자다 "  따라서 우리가 다른사람의 덕을 칭찬하는 것은  우리가 거기서 이익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장점과 이성을 자신의 보존과 발전 진보에 쓰지 않고, 우리의 보전과 발전 진보에 쓴다. 도덕적 믿음은 늘 집단의 믿음이며 이때 집단은 의견을 달리하는 어떤 개인보다도 위대하다." 도덕 때문에 개인은 자신이 집단에 이익이 되는 기능을 할때만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긴다."  도덕은 개인속에 있는 무리 본능이다. 그들의 도덕률은 그들을 보호해줄 뿐아니라(그들의 바람이지만) 그들과 그들이 사는 방식을 정당화 해준다.

도덕적 관념이 그저 인간의 이기심과 진화론적 생존 본능의 결과 뿐이라면 도덕적 원리와 계율의 오랜 원천인 종교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있을까 ? 그리고 우리의 신들은 어떻게 될까 ?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과 만난다.

종교, 도덕, 과학, 이것들의 역사는 너무나 인간적이다. 그것들은 자신이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야심찬 희망일뿐이다. 이것들을 모두 비판적으로 고찰했을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의 사고는 그 밑바탕에 동기와 욕구를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전반적으로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우리 기관 가운데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을 가장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의식은 유기체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가장 늦게 발달한 부분이며 따라서 가장 완성되지 않은 가장 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의식으로부터 수많은 오류가 발생해 사람이 필요이상으로 일찍소멸할 수 있다. "

나의 의지가 우연히 집단의 의지와 일치한다면 그야 말로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이것은 이른바 민주주의 역설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민주주의에서 나는 두가지 원칙을 따라야 한다. 하나는 다수의 의지(국가)이고 다른 하나는 내자신의 의지 이다.

어떤 이유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건다는 것은 '살려는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게 있다는 것을 말해주며, 그것은 곧 힘에의 의지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는 자신의 행동 반경과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확대하려 한다는 자신의 힘을 키우려 한다는 인간 행동의 원리, 인간 행동의 심리적 동인에 관한 원리이다. 모든 행동에 완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그행동에 대해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말이 나오면 철학자들은 곧바로 아주 대단하고 고결한 소음을 내기 시작한다.철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이 냉정하고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과정에서 나왔다고 믿고, 이러한 '냉철하고 순수하며 객관적인 변증법'을 신비주의자들의 믿을 수 없는 주관적인 노력과 대비 시키기 좋아한다.하지만 철학자들의 사고에는 늘 그것에 앞서 욕망과 편견, 열망 또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소망 즉 비이성적인 욕구와 욕망이 있으며, 철학자들은 이것을 추상적으로 만들어 이성으로 보호한다. 더간단히 말하면 철학은 도덕적 믿음과 직관, 욕망에 합리적 주장이라는 옷을 입힌거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희생이다. 그것은 모든 자유와 긍지, 정신의 모든 자기 확신을 희생시키고 스스로 노예가 되어 자신을 비웃고 자신을 불구로 만든다. 

인간이 존재한이래 인간의 무리(가족, 공동체, 부족, 민족, 국가, 교회 등)또한 존재했으며, 늘 명령하는 사람은 아주 적은데  비해 복종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인간들 사이에 복종만큼 잘 그리고 오랫동안 훈련되고 훈육된 것도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제는 누구나 '너는 무조건 이것은 이해해야 하고 저것은 해서는 안된다'고 너는 어찌어찌 해야 한다고 명령하는 일종의 형식적 양심으로 복종의 욕구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해도 지난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욕구는 충족되고자 하고, 내용으로 형식을 채우고자 해, 자신의 힘과 조급함과 긴박함에 따라 거의 닥치는 대로 아무것에나 손을 뻗고, 부모와 교사, 법, 계급적 편견, 여론과 같은 명령자가 자기 귀에 대고 소리치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인다. 니체는 그런 명령하는 의지들은 대개 자신이 자기보다 높은 권위(조상, 정의, 법, 심지어는 신)을 대변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집단에 대한 권위를 유지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려면 대개 엄청난 자기 기만과 배신이 필요한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가치를 만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가치를 어쩔수 없이 따른다.

인간이 이성을 통해 추론한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왜냐하면 이성은 직면하기 두려운것 어떤 아주 불쾌한 진실은 감추려 들기때문이다.

니체는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을 파헤치고 더불어 죄책감 또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현상도 파헤친다. 양심은 인간의 심리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생긴거라고 말한다. 양심은 사회구조와 법률이 만들어지면서 생겼고, 이것은 다시 본능의 억압과 합리성의 발달에 의존한다. 진화과정에서 일어난 이러한 도약 우리가 동물에서 벗어나 호모사피엔스가 된 것이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의 원인이다.

좋다는 것은 사회 집단의 행동을 규정하고 규제하는 고귀한 강자들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지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라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제기했다. 권력을 위한것 그런데 누구의 권력 ? 병든 문화나 건강한 문화를 위한것 ?  신을 그리워하지 않고 존재하기 위한것

포스트모던 시대를 예견한 니체의 우화로 이책을 마무리 한다.

"지식의 돈 후안....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은 사랑하지 않지만 자기에게 완전히 해로운 것을 제외하고는 사냥할 게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지식을 추구하고 지식의 음모를 즐기려는 강한 욕망이 있따. 그는 마지막에는 압생트(쓴 쑥으로 맛들인 독한 술)와 질산까지 마셔버리는 술 고래와 같다. 그래서 그는 결국 지옥을 탐닉하고자 한다. 이것이 그를 유혹하는 마지막 지식이기에. 그러나 모든 지식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결국은 그를 환멸에 빠지게 할 것이다. .. 우주 전체에 이 굶주린 자에게 줄것이 하나도 남지 않을테니까 "  그런데 우리 인간은 아뭇도 의욕하지 않느니 차라리 허무라도 의욕하려고 할까 ?

니체처럼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의지만 존재한다고 하면 그래서 지식이나 판단을 진리의지란 차원에서 파악하게 되면, 어떤 지식이 진리인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 지식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가 어떤 효과를 의지하고 있는가 하는 게 중요해집니다. 결국 이 질문을 통해 지식의 문제는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며, 어떠한 효과를 의지하고 있는가 하는게 중요해진다.(철학과 굴뚝청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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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의 지식여행 헤겔 편이다. 읽을 책 리스트에 들어 가있지 않은 책인데 도서관에 갔다가 발견한 책이다. 하룻밤의 지식 여행으로 플라톤에서 촘스키까지 수학에서 심리학까지 50권으로 정리한 책이다. 헤겔을 비롯한 니체, 카뮈, 사르트르 , 하이데거를 먼저 빌렸다. 텍스트가 많지 않아 하룻밤에 읽기에 적당한 분량이었다. 물론 한사람의 철학을 하룻밤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삶과 이론의 개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소피의 세계(요슈타인 가이더), 철학과 굴뚝청소부(이진경), 서양철학사(러셀), 철학 vs 철학(강신주), 철학의 교실(오가와 히토시)의 헤겔 관련 내용을 참조해서 읽으니 집중도가 향상 되었다.  

이 책에서 언급한 헤겔 철학내용을 주요사항을 발췌하였다.

헤겔은 계몽주의 시대의 고전적인 합리주의에서 후기 계몽주의 시대의 독일 낭만주의로 가는 길을 따른다.  헤겔은 결국 계몽주의를 정신적인 것으로 만들고 낭만주의를 지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을 신봉하며 교회와 국가의 사악한 동맹에 반대했다.  이때 철학의 역할은  신앙과 이성의 대립 시키는 것이었다.

칸트는 인식의 주체(인식하는 자)와  인식의 대상(인식되는 것)을 분리했고 이러한 분리는 주체 안에서도 일어났다. 칸트는 세비판서에서 인간의 능력,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은 분리되어 잇음을 강조햇을 뿐이다.  피히테와 셸링, 그리고 헤겔은 칸트가 해소하지 못한 분리- 신앙과 이성의 분리, 교회와 국가의 분리, 무한과 유한의 분리-를 해소하려고 했다. 

네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인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너의 의지에 반하더라고 보편적인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한 준칙에 따라 행동하라 

스피노자는 정신과 물질 또는 정신적인것(또는 지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모두 그 밑바탕에 있는 같은 실체의 다른 축면일뿐임을 증명하려고 해 이실체는 신과 같은 것이다. 신은 우주, 즉 모든 것의 총체와 같은 것이다.  

정신 현상학은 의식이-여행을 통해-단순한 직접적인 의식에서 채계적인 학문의 형태로 확장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헤겔의 철학은 조각난 채 흩어져 있던 인류의 기억을 모아 복원한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자기 실현의 역사를 의미 있는 전체로 봄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파악하려는 인간의 고투이다.

헤겔이 재현한 인류의 진보 역사는 의식이 어떻게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지 그럼으로써 어떻게 의식이 자기 의식이 되는지-또는 어떻게 의식이 이미 자기의식임을 깨닫게 되는지 보여준다. 자기의식 또는 주관성은 무엇인가-객체가-결핍되어 있다는 의식이다. 자유는 여기서, 욕망에서 시작된다. 자기의식은 자신의 통일성과 목적을 깨달은 의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의식들과 분리되어 있는 다른 의식들로 부터 괴립되어 있는 의식이기도 하다.  욕망, 의식과 자기의식, 두려움, 소외, 억압된 노동의 결과로서 창조되는 세계-이 모든 것에서 일어나는 투쟁은 결국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이다.

정신 현상학은 14단계를 거쳐 감각적 확신에서 절대지에 이른다. 14단게에는 크게 의식, 이성, 정신으로 나누어진다. 헤겔은 이 여행을 절대정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이미지롤 끝맺는다. 역사가 걸어가는 길과 인식의 학문이 걸어가는 길은 절대 정신이 못 박히게 될 골고다 언덕위에서 만난다.  정신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고 창조한 세계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이 생성된 과정, 즉 역사가 의식적인 자신을 매개로 한 과정이라는 것을 - 시간으로 외화된 정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회나 역사로 외화된 절대정신은 역사의 발전 과정을 통해, 그리고 그속에서 자기 발전 과정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인식에 도달한다. 절대 정신은 다시 자기에게로 복귀한다. 이런의미에서 역사는 절대 정신의 실현이란 목적을 향해 발전해 가는 목적론적 과정이다.

헤겔에게 의식이나 정신이란 어떤 개인의 의식이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운동한는 절대자요 절대정신이다.  따라서 헤겔은 진리란 절대정신의 자기 의식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돌아보면서진리의 기준을 계속 정정해 가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진리를 확인하고 보증해 주는 것은 발전해 가는 절대정신 자신인 것이다.(철학과 굴뚝청소부) 

헤겔에게는 전체만이 진리이다. 모든 단계와 국면, 계기는 부분적이고, 따라서 부분적으로만 진리이다. 여기서 헤겔은 총체성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떠 올린다. 총체성이라 자신이 극복하거나 포섭한 모든 생각이나 단계를 모두 자기안에 간직하고 있는 전체이다. 따라서 극복하거나 포섭하는 것은 여러가지 "계기"(단계 또는 국면)로 이루어진 발전적인 과정이다. 총체성은 이와 같은 모든 "계기"를 국면이나 단계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요소로서 간직하는 이런 발전적인 과정의 산물이다.

지양,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서로 연관성이 없는 명제들을 연역적인 추론형식으로 다룬다. 헤겔은 논리를 이렇게 정적인 것으로 보는 고전적인 견해를 해체하고 논리를 전체를 향해 나아가는 역동적인 운동으로 만든다. 전체는 자신을 극복하고 동시에 극복한 것을 자기안에 보존해가는 과정이다.  헤겔은 모순을 극복하고 동시에 보존하는 것을 지양이라고 부른다.

존재와 무, 양과 질처럼 서로 대립하는 개념들이 처음에는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서로 완전히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들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석 또는 추론을 통해서만 알 수있다.  안과 밖처럼 서로 대립하느 개념들이 자기안에 상대방을 직접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하나를 정의하면 다른 하나도 동시에 정의된다.

개체성이 언뜻보기에는 서로 대립하는 원리처럼 보이는 보편성과 특수성으로 부터 형성되된다. 보편성=동일성,  특수성=비동일성,개체성=독특한 상호 관계망 따라서 '개체'는 자신을 유지하는 관계들과 자신과 비슷한 것들, 자기와 다른 것들로 짜인 망이다.

헤겔에따르면, 의지는 본질적으로 자유롭다. 우리가 짐승과 다른 것은 인간은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의지가 있다는 것은 자유롭기를 바란다는 뜻이고 따라서 어느정도 이미 자유롭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때는 추상적으로 자유로울 뿐이다. 자유의 실현은 - 자유가 구체적인 현실이 되는 것은 -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이다.  "철학은 늘 현장에 너무 늦게 나타나서 세계가 어떠해야 한다고 가르쳐 줄수가 없다. 세계에 대한 사유인 철학은 현실이 거기 있을때만, 현실이 형성되는 과정이 모두 끝난 뒤에야 생기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철학이 회식에 회색을 첫칠할때 생의 한 형태는 이미 늙어버려 철학이 회식에 회색을 덧칠해도 생이 젊음을 되찾을 수는 없다. 그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깃들무렵에야 날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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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게 읽은 소설이다.  소설책이지만 내용은 철학이다. 소크라테스부터 프로이트까지 철학자들의 사상을 쉽게 풀어썼다.  

" 철학적인 사색의 길이 비록 고통스넌 정신의 노동과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라 하더라 거기에는 아름다움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는 책이다.  읽는 이로 하여금 철학적 삶과 태도에 자연스런 동경을 불러 일으킨다. 사람들은 철학을 대중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철학을 통속화 시키지만  작가는 철학에 아름다움의 옷을 입혔을 뿐이다". 이책을  감수한 이의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도 철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책이다. 이책을 읽는 도중에 러셀의 "서양철학사"와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을 일부 참조하면서 읽었다. 딸에게도 아빠가 적극추천하여 작은 딸의 읽을 책 리스트에 올라와 있다. 

 소피의 철학적 물음으로 부터 시작된다.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어디서 부터 왔는가 ? 세계는 어디에서 부터 생겼는가?  우리가 자라면서 중력의 법칙에만 익숙해지는 것이 아나라 동시에 세계 자체에 길들여저 세상에 대한 의문과 놀라움을 잃어 버린다. 유년시절을 보내고 나면 모든 것이 당연하고 흡수하기 바쁘다. 

 이 책은 소피가 세상에 대한 의문과 놀라움을 풀어 가는 과정이다. 알바르토 크녹스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부터 통사적으로 철학을 배우게 된다. 

칸트가 '사물자체'와 '우리에게 보이는 사물'을 구분한 일은 그가 철학에서 기여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사물 '자체'가 어떤지 우리는 절대로 확실히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그 사물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만 알 수 있다.  그 대신 우리는 사물을  사람의 이성이 어떻게 파악하는지는 경험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다.  크녹스 선생님의 칸트의 철학 설명 내용이다. 

언어가 이성을 빌어서 자기자신을 표현한다. 언어가 개인을 지배한다. 언어의 특성이 사고를 결정한다. 어느 강의에서 들은 내용이다. 헤겔 철학 설명에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이성은 특히 언어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는 태어나면서 어느 언어에 속한다. 노르웨이 어는 한센 씨가 없더라도 전혀 변하지 않지만 한센 씨는 노르웨이 어가 없으면 생활할 수 가 없다. 개개인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개개인을 만드는 거다." 헤겔의 이성이나 세계정신의 '객관적 힘'이라고 부르는 것에 큰 중점을 두었다는 설명내용이다. 

처음에 생생한 현실이었던 소피의 세계는 딸에게 생일 선물로 주기위해 창작한 소설속의 이야기가 된다. 소설 속의 소설 세계 인것이다. 나의 세계 또한 절대자의 창작 세계 ? 서양 철학의 줄거리를 재미 있게 읽고 싶은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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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어떤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질 들뢰즈)  "만들어진 신(김영사, 도킨스)" 과의 마주침은 종교에 대해 사유하고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리처드 도킨스가 종교에 대한 문제제기와 과학적 논증을 통한 신의 부재를 이야기 하였다. 이 책을 펼칠때 종교를 가졌던 독자들은 책을 덮을때는 무신론자가 되어 있을 것라고 한다. 어린 시절의 교화가 치밀하지 않았거나, 또 어떤 이유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그것을 극복할 정도로 강한 지성을 타고난 사람들,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약각만 도와주면 종교라는 악덕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한다.

종교를 악덕으로 표현한 것은 종교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로 대신 할 수 있다.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런던폭탄테러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화약음모사건, 인도 분할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브스니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도, 유대인을 '예수 살인자'라고 박해하는 것도,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 먹는 복음전도사도 없다.

이 책에서 신에 대해 이야기 할때 유신론자의 초자연적 지성을 말한다. 즉 우주를 창조하는 큰일을 했을 뿐아니라 여전히 주위를 맴돌면서 자신이 창조한 것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자연이나 우주 또는 그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을 가리키는 비 초자연적 동의어로 사용하는 범신론의 신을 의미 하지 않는다. 범신론의 신은 물리학자들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신 존재에 대한 증명에 대한 러셀의 차주전자 우화로 그 거증책임이 불신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있다고 이야기 한다. 신이 존재 한다는 가설이 우주에 과학적 가설 중 하나로 다른 모든 가설처럼 회의적으로 분석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수용된 독단적 견해는 독단론자들이 아닌 회의론자들이 반증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물론 그것은 잘못이다. 내가 지구와 화성 사이에 타원형 궤도를 따라 태양을 도는 중국 찻주전자가 하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찻주전자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다는 단서를 신중하게 덧붙인다면, 아무도 내 주장을 반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주장이 반증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인간이성에 대한 용납하기 어려운 억측이라고까지 내가 말한다면 그건 헛소리로 여겨져야 옳다. 하지만 그런 찻주전자가 존재한다고 옛 서적에 명확히 나와 있고, 일요일 만다 그를 신성한 진리라고 가르치며, 학교에서도 그를 아이들의 정신에 주입시킨다면, 그 존재를 선뜻 믿지 못하는 것은 괴짜라는 표시가 될 것이고, 이를 의심하는 자는 계몽시대의 정신과의사나 그 이전의 종교 재판관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러셀)

신의 존재와 관련된 각종 논증들을 보여준다. 성서는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가 아니라고 한다.  대다수의 명성 있는 성서학자들은 '성서'를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담은 신뢰할 만한 기록으로 보지 않는다.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가 사망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뒤에 쓰였다. 심지어 예수의 삶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사도 바울의 서간들보다 한참뒤에 쓰인 것이다. 그뒤로 모든 복음서들은 종교적 의도를 지닌, 오류에 빠지기 쉬운 필경사들을 통해 복사되고 또 복사 되었다."고 한다.

대부부의 기독교 신자들의 성경에 신의 존재를 의지한다. 성경 내용이 진실임을 믿는다. 진실인 것과 진실이라고 믿는 것의 차이의 구분이 필요한 부분이다. "크레도 퀴아 압수드룸"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중세의 관용어이다.  종교가 진리인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진리인지가 중요하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신의 비존재를 어떻게 확인 하는가 ? 신이 없다면 생명은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겠는가 ?

비개연성 논증을 통해 복잡한 것들이 우연을 통해 출현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신의 존재는 설계자 자신의 기원이라는 더 큰 문제를 제기 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지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존재는 더욱 개연성이 없을 것이 분명하며 신은 기 지독한 회귀를 종식시키기는커녕 극도로 악화 시킨다고 표현한다.

생명출현은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통해 훨씬 더 경제적이고 우하하게 설명되며, 유일한 대안이라고 이야기 한다.

신이 무엇인가의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설명의 부재, 어깨를 으쓱하는 것, 영성과 의식으로 치장한 '난 몰라'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신의 공로로 돌린다면, 일반적으로 그 말의 의미는 그것을 자신의 능력 밖의, 이해할 수 없는 요정과 같은 범주로 본다는 것이다. 그 녀석이 어디에서 왔는지, 설명을 요구하면, 그것이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거나 자연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등의 모호하고 사이비 철학적인 답변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런 대답은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신앙은 우리가 가진 이성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을" 것을 요구하는 터무니 없는 것이다.(키에크케고르)

 인류학자와 역사학자는 모든 문화권에  종교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과학적 사실과도 명백히 모순되는 신앙을 지니고 있으며 손실을 무릅쓰고 거기에 시간과 자원까지 투자한다. 그들은 종교를 위해 죽거나 종교를 위해 죽인다. 우리는 당혹스러워하면서 왜나교 묻는다. 종교적 행동은 빗나간 것 즉 다른 상황에서 유용한 혹은 과거에는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의 불운한 부산물 이라는 견해를 들어 내다.  이 의견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에게서 자연적으로 선택된 성향은 종교 자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혜택이었고, 그것이 부수적으로 종교적 행동으로 발현되었을 뿐이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종보다도 더 앞선 세대들의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생존하며, 그 경험을 아이들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대물림한다 이러한 경험으로 획득된 말은 의심하지 말고 따르라. 일반적으로 아이에게 매우 유익한 규칙이다.  그러나 현재에는 그것이 잘못될 수 있다. 빛을 나침반으로 이용하는 나방의 특성이 촛불을 향해 달려들어 의도하지 않은 '자살'로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천성적 이원론과 목적론은 적절한 조건이 주어지면 종교로 향하게끔 성향을 부여한다. 우리의 타고난 이원론은 영혼을 몸의 통합된 일부가 아니라 몸에 깃든 별개의 것으로 믿게 한다. 아이의 목적론은 더욱 확연히 종교를 받아들이게끔 우리를 설정해 놓는다. 모든 것이 목적을 지닌다면, 그것은 누구의 목적인가 ? 물론 신의 목적이다.

우리는 종교 없이 선할 수 있는가 ?

고대에 우리는 가까운 친족과 잠재적인 보답자에게만 이타적일 수 있었다 오늘날 그 제한조건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경험 규칙은 남아 있다. 왜 사라지지 않았을까 ? 그것은 성욕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성(불임이나 다른 어떤 이유로 자식을 낳을 수 없을지도 모를 상대)에게 욕망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울먹이는 불행한 사람(친척도 아니고 보답을 받을 수도 없는 눈군가)을 볼때 어쩔 수 없이 측은 지심을 느낀다.  다윈주의적 실수다. 그러나 그것은 다행스럽고 고귀한 실수다 
도덕감정이 종교이전의 다윈주의적 과거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추진하는 것은 수백만년에 걸쳐 진화한 마음의 능력중 하나인 일종의 보편 도덕 문법이다.그 안에는 다양한 도덕 체계들을 구축할 원리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서구인들과 거의 접촉이 없고 공식 종교도 지니지 않는 중앙아메리카의 쿠나족을 대상으로 그 도덕을 실험해 보았다.그  결과 우리와 똑같은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 무신론자와 종교인의 판단에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선하거나 악하기 위해서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교회에 가면 착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라고 생각은 잘못일지도 모른다.  

전쟁의  동기로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자신의 종교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이고, 모든 이단자들과 경쟁 종교의 추종자들은 죽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신의 병사들은 순교자의 천국으로 진행한다고 명확히 약속하는 경전의 뒷받침을 받는 흔들림 없는 신앙이다. 자살 테러와 인간 폭탄의 양산이 이 신앙이다. 이 신앙은 아이들이 선택한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종교나 태어난 곳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슬람 아이가 아니라 이슬람 신자의 아이이다. 그 아이는 너무 어려서 자신이 이슬람교도 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도킨스는 특히 근본주의 종교에 적대적이다. 과학적 탐구심을 적극적으로 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마음을 바꾸지 말고, 알아낼수 있는 것들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것을 과학을 전복시키고 지성을 부패시킨다. 근본주의 종교는 수많은 순진하고 선량하고 열의가 있는 젊은이들의 과학 교육을 망치려고 필사적이다. 비 근본주의적인 양식 있는 종교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종교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아이들에게 의심없이 믿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침으로써 근본주의가 활개 칠 세상을 만든다.

전쟁의 동기로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자신의 종교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이고, 모든 이단자들과 경쟁 종교의 추종자들은 죽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신의 병사들은 순교자의 천국으로 진행한다고 명확히 약속하는 경전의 뒷받침을 받는 흔들림 없는 신앙이다. 자살 테러와 인간 폭탄의 양산이 이 신앙이다. 이 신앙은 아이들이 선택한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종교나 태어난 곳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슬람 아이가 아니라 이슬람 신자의 아이이다. 그 아이는 너무 어려서 자신이 이슬람교도 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종교의 역할 중에 하나가 두려움의 위로라고 한다. 하지만 종교 없이도 위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철학자는 노인이 죽는 순간이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다고 지적한다. 한때 그였던아이는 오래전에 '죽었다' 갑자기 목숨이 끊어져서가 아니라 성장했기 때문이다. 노인이 마침내 숨을 거두는 순간도 그의 평생에 걸쳐 진행된 느린 죽움들과 다를바 없다.  저자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한다.  태어나기 전 영겁에 걸친 세월을 죽은 채로 있었고, 그사실은 내게 일말의 고통도 준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령 활짝 열린 과학의 창문들이 처음에는 대대로 내려온 인간화한 신화들이라는 안락한 실내 온기에 적응되어 있던 우리를 덜덜 떨게 할지라도 결국에는 신선한 공기가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드넓은 세상이 우리 앞에 장엄함을 드러낼 것이다.  신이 사라지면 틈새가 생길것이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메울 것이다. 저자는  현실세계의 진리를 찾으려는 정직하고 체계적인 노력인 과학을 그렇게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종교에 대한 마주침을 원하는 사람, 당연하게 생각했던 믿음을 고민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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