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피아 성당을 나와 우리 가족은 예례바탄 지하궁전으로 향하였다. 궁전이지만 실제 용도는 지하 저수지 였다고 한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자 갑지가 어두어 졌다. 어떤 영화에서 본 기억이 있다. 영화에서는 물이 어느 정도 채워져 있었던것 같은데 물은 거의 없었다. 바닥이 보였다. 습기로 인한 축축한 기운이 느껴졌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어둠속에서 확대 되었다. 수많은 돌기둥이 규칙적으로 배치 되었다. 전체 기둥이 336개라고 한다. 길이 143m, 폭이 65m, 높이 9m에 이른다고 한다. 불빛이 신비로움을 더했다. 빛이 비추는 통로를 따라 갔다. 아내와 큰 딸은 무섭다고 중간에 되돌아 갔다.
막내와 나는 더이상 갈 수 없는 안쪽 까지 갔다. 더이상 갈수 없는 곳에 이르자 메두사의 얼굴 조각이 보였다. 돌기둥의 받침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2개 있는데 하나는 누운채로, 하나는 거꾸로 물속에 박혀 있는 모습이었다. 비잔틴 시대의 기독교 인들에게 메두사가 이교도의 유물이었기 때문에 건축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메두사의 머리를 거꾸로 한 이유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면 돌이 되어버린다는 전설과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여러 대리석 기둥의 반복 속에 메두사의 얼굴상이 관심을 끌고 있었다.
이스탄불 가족여행 이틀째다. 일찍 잠에서 깨었다. 커튼을 젖히니 바다 위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햋빛이 바다불에 반사되었고 그사이에 배가 위치해 있었다. 구름과 어우러져 장관이었다. 가족들은 피곤했는지 아직 꿈나라다. 혼자 보기에 아쉬워 카메라를 들었다. 순간 변하는 모습은 담지를 못했다.
아침을 숙소에서 해결 했다. 호텔 아침 조식이 다른 곳보다 많아서 아이들이 좋아했다. 패키지 여행이면 서둘러서 출발 했을텐데. 아침을 충분히 먹은 다음 택시를 타고 성소피아 성당으로 향했다. 도로를 시원하게 달려 성소피아 성당근처에 도착 했다. 아야소피아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에 의해 360년에 지어졌다. 대주교 크리소스톰의 유배 문제로 폭동이 일어나 404년에 소실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해 재건되었다가 532년에 발생한 니카 반란으로 다시 전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6년의 건축 기간을 거쳐 537년에 완공 되었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제국에 정복 당할때까지 성당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성당은 모스크로 바뀌었다. 1934년 박물관으로 지정되기까지 481년간 모스크 사원으로 사용된 것이다. 모스크로 바뀌면서 성당 안벽은 회칠로 덮이고 이슬람 코란의 문자와 문양들이 채워졌다고 한다.
성소피아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다. 줄을 따라 매표소와 보안대를 통과하여 성당안에 들어 섰다. 거대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여러 창문을 통해 빛살이 들어와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왼쪽부분은 공사중으로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가장먼저 눈에 들어 온것은 아랍어가 쓰여진 원형판 이었다. 7개의 거대한 원형판이 주위를 두르고 있었다. 중앙제단 위쪽 돔에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의 성화가 보인다. 오른쪽 원형판에 쓰여진 곡선 모양의 아랍어는 알라를 의미하고 왼쪽의 직선 모양의 글자는 무함마드를 나타낸다고 한다. 중앙 제단에는 문모양의 황금색 미흐랍이 위치해 있다. 메카의 방향을 나타낸다고 한다.
우리는 2층으로 올라 가는 길을 찾았다. 빛이 들어 오지 않아 어두 웠다. 경사진 통로를 꽤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성당 내부를 바라보니 전체적인 구조가 보였다. 복도와 같이 생긴 통로를 따라 가다 모자이크 기독교 성화들을 만났다. 회칠로 덮여진 모자이크 성화를 터키 공화국에서 복원하였다고 한다. 일부만 복원된 성화도 보였다. 성화 중 11세기의 작품으로 중앙에 예수가 있고 그 양옆으로 여황제 조에와 조에의 세번째 남편 콘스탄티누스 9세 그림이 있다. 예수에게 헌금을 봉헌하는 그림이다.
조에에 얽힌 사랑 이야기이다.
조에는 23살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오토 3세와 약혼을 한 사이 였다. 그런데 황제는 열병으로 사망을 하였고 조엔느 이십년동안 수도원에서 살게 되었다. 푸른 청춘을 수도원에 가둔 채 살아야만 했던 조에는 야위어가는 꽃과 같았다. 조에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8세는 제국을 이을 후손이 없자, 조에를 60대의 노인 로마누스와 결혼 시켰다. 아버지에 의해 조에의 청춘과 사랑과 생이 상상조각 나버렸다. 조에와 로마누스는 애정 없는 결혼에 금세 염증을 느꼈다. 어느날 목욕탕에서 남편 로마누스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때 오십대 중반을 훌쩍 넘긴 조에는 열 몇살의 미소년 미카엘과 열애 중이었다. 조에는 미카엘과 결혼식을 올렸지만, 새 활제가 된 미카엘 4세는 결코 조에를 사랑하지 않았다. 조에는 미카엘에 의해 다시 수도원으로 추방을 당했다. 그러다 다시 궁전으로 돌아온 조에는 육십네살의 나이에 세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세 번째의 남편 콘스탄티누스 9세는 왕위가 탐났을 뿐, 사랑하는 여인이 따로 있었다. 72살의 나이로 죽을때까지 뜨거운 사랑을 갈말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터키, 낯선 시간에 흐르다, 문윤정)
창문 밖으로는 블루모스크가 보였다. 오전 내내 성소피아 성당에서 보냈다. 성당을 나와 겄는데 한국말로 인사를 하는 현지 학생 들이 있었다.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세상이 점점 좁아 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시아와 유럽을 품고 있는 이스탄불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인도 비자 갱신을 위한 여행 이었다. 토요일 출발하여 수요일날 복귀하는 5일 일정 이었다. 여행 일정 계획은 내 몫 이었다. 터키 전체를 여행할지 아니면 이스탄불만 여행 할지 결정해야 했다. 혼자 만의 여행 이라면 터키 전체 한번 돌아 볼 생각 이었지만 가족 여행은 다르다. 여유로운 여행 의견으로 이스탄불로만 한정하였다. 숙소도 한곳으로 정했다. 터키 국내 항공권 예약도 필요하지 않아 일은 줄었다.
토요일 아침 6시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로 떠났다.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하자 작은 긴장이 있었다. 몇년전 이스탄불 공항테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탄불로 정했을때 막내가 안전을 물어 보기도 했었다. 우려와는 다르게 공항은 평화 스러워 보였다. 승객이 많았다. 출입국 심사 줄이 길어 많이 기다려야 했다. 여행은 우리를 설레게 하고 주위를 다르게 보게 한다. 4~5살 자리 현지 남자아이가 인사를 하였다. 가족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스탄불에서의 첫 인상이 좋았다.
택시를 탔다. 공항과 숙소가 가까워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택시 기사도 밝고 친절하였다. 숙소에 도착하였다. 바다가 휜히 보이는 고층 이었다. 짐을 풀고 이스탄불 시내로 가려고 했다. 첫날 계획 목적지는 아야소피아 성당이었다. 그러나 가족 여행은 변수가 있다. 피곤하다고 한다. 숙소에서 쉬다가 오후에 가자고 하였다. 나는 피곤하지 않은데 빨리 여행지로 가고 싶은데...
오후 늦게 아야소피아 성당으로 향하였다. 택시에 내려 성당을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출입구와 매표소를 찾았는데 시간이 너무 늦었다. 계획을 변경하였다. 오늘은 야야소피아 성당 맞은편에 있는 불루 모스크 향했다. 푸른색 타일이 많아서 블루 모스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공식적인 명칭은 술탄아흣멧 모스크이다. 모스크의 권위는 첨탑(미나레) 숫자로 결정되는데 블루모스크의 첨탑 수자는 6개로 메카 성전보다 1개 적다. 아부다비 그랜드 모스크는 첨탑이 4개 이다. 여자들은 옷을 갖춰 입어야 했다. 그랜드 모스크방문 경험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다.
블루 모스크안에 들어 서자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돔 형태 천정이 보였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빛이 들어 왔다. 성스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다 모스크를 나왔다. 모스크 앞에서 아야소피아 성당을 바로보며 그림자 사진을 찍었다. 터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소피아 성당쪽으로 향하였다. 늦게 여행을 시작한 탓인지 벌써 어둠이 찾아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