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손된 존엄을 찾고자 하는 여행
직장인 소통 장소는 담배 피는 곳이다. 일이 안풀릴때나, 장시간 화면을 보았을때 잠시 쉬기 위해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도 커피를 들고 따라 나간다. 잠시 외부 공기를 마시며 대화 한다. 일의 진행을 이야기 하고, 개인 적인 고민도 공유 한다. 오늘도 바쁜 일을 마무리하고 커피 한잔을 들고 동료와 밖으로 나갔다. 동료 아들이 군입대를 위한 신체 검사를 받았다고 하였다. 2급 판정 현역이라고 하였다. 대화의 주제는 군대 이야기를 흘렀다.
군대에서 먹었던 초코파이 이야기를 하였다. 훈련소 시절 초코파이가 너무 맛있어서 한 박스를 먹었다고 하였다. 일요일 종교 행사에 천주교에 다녀온 경험을 이야기 하였다. 천주교에 갔더니 과자도 주고, 합창단 성가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회 기분도 느낄 수 있어 좋았다고 하였다. 이 소문이 훈련소내에 퍼져 일요일 천주교 종교행사에 훈령병이 많이 몰리고 다른 종교 행사에는 사람이 적었다고 하였다. 이 사실을 눈치챈 훈련소 교관이 천주교 행사를 마친 훈련병들에게 오리 걸음으로 복귀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사제 기름을 빼야 된다고 하였다고 한다. 훈련병은 부당한 지시 였음에도 거부하지 못했다. 아니 부당함 마저도 인식하지 못했다고 한다. 옛 군대에서는 배도 고팠고, 인간적인 존엄도 인정 받지 못하였다. 모욕당했으며 무시 당했다. 그럼에도 군이라는 위계 질서 속에서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였다.
대량 생산의 산업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를 군에서 몸에 각인 시켰다. 위계 질서 안에서 복종하였고 받아 들였다. 직업을 가진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에 반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길거리에서, 공장에서, 고공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왜 투쟁을 했을까 ? 여러가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를 분석한 책이 있다.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이다. 철학자인 호네트는 인정이라는 틀로서 이러한 투쟁을 분석하였다.
고문이나 폭행이 단순히 신체적 고통과 속박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자기 존엄의 추구를 짓밟고 모멸감을 유발 하게 한다. 우리는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인격 무시나, 기본적인 요구가 부당하게 무시 될 때 모멸감과 모욕감을 느낀다. 또한 우리에게 응당 부여 되어야 하는 권리에서 배제 되었을 때도 굴욕을 느낀다.
인정 투쟁의 출발점 이라고 한다. 인정 투쟁은 모욕당한, 훼손된 자기 존엄을 찾고자 하는 여행이라고 표현하다. 투쟁에 동기를 부여하는 또 다른 원인도 무시 경험과 연결되었다고 한다 사회적 수치감 속에서 굴욕과 모욕을 수동적으로 참아낼때 가지게 되는 자기 존엄의 상실에 대한 대항 감정이라고 한다. 인정 투쟁이라는 정치적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무시당했던 자신의 존엄을 공개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상실된 자기 존중을 되찾게 된다고 한다. 훼손된 존엄을 찾기 위한 행동이 인정투쟁의 원인 이라고 하였다.
인정 투쟁이 욕심을 채우기 위한 탐욕도, 배부른 돼지의 투정도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존엄을 되찾기 위해 인정 투쟁을 벌이는 이웃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의 의무라고 역설한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훼손된 존엄을 위해 인정 투쟁을 벌이는 이웃들에게 침묵을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도 뉴스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사회 투쟁은 이러한 인정 투쟁이다.
다른 인정 투쟁이 있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좋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 팀원간의 경쟁이 있다. 회식에서 제일 먼저 술을 따르고, 2차 노래방에가면 머리에 넥타이를 두르고 템버린을 치며 흥을 돋군다. 출근은 먼저 퇴근은 다음이다. 기회가 있을때 마다 실적을 최대화해서 어필 해야 한다. ‘의전’이라는 명목으로 일상에서, 출장에서 눈치를 보며 최고의 만족을 위해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을 쓴다. 여기에서 자기는 없다. 상사의 마음에 들고 눈도장 찍혀 다음 승진 일순위가 되고자 한다. 속류화된 인정 투쟁이다. 아부의 능력이 인정과 연결 된다.
사람은 각자의 가치관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 한다고 한다. 자신의 안경으로 세상을 본다. 배부른 돼지와 속류화된 인정에 익숙한 사람들은 인정 투쟁을 개인적인 욕심이나 투정으로 본다고 한다. 이전 군에서 경험한 것 처럼 훼손당한 자존감에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 했다고 한다. 자기 존엄과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을 하는 사람들 뜻을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뉴스를 본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사적인 이익을 위한 투쟁 인지 ? 훼손된 존엄을 찾고 약화된 존중을 찾기 위한 인정 투쟁 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관심을 갖고 깊은 곳 까지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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