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점심 시간은 공식적으로 12시부터 1시까지 이다. 특별히 점심 약속이 없는 날은 회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12시에 사내식당에 가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11시 40분 정도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회사앞 외부 식당에서 같이 먹기로 하였다. 식당에 들어 서려고 하자 건축 작업복 차림의 아저씨 여러명이 앞서서 먼저 들어갔다. 순간 방학때 했던 건설 아르바이트가 생각이 났다. 벽돌을 나르거나 부서진 콘크리트를 리어커로 실어 나르기도 했었다. 옷에 시멘트 먼지도 묻었다. 점심시간이면 먼지를 털고 식당에 들어 갔다. 새벽에 일어났기 때문에 점심 밥이 맛있었다.
작업복 차림의 아저씨들을 지켜 보았다. 나의 아르바이트 시절을 생각하며 젊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였다. 젊은 사람은 없었으나 두세명의 백인 노동자를 발견하였다. 순간 먼지 묻은 복장이 안어울린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은 러시아인일 거야 였다. 만약 동남아인 이었다면 나의 시선도 끌지 않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자리에 앉아 밥을 먹으며서도 일행을 지켜 보았다. 백인 아저씨가 음식도 챙기고 수저도 챙겼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의 권력관계상 아래 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런 모습들이 낯설게 보였다.
내 안에 새겨진 서양인, 백인의 이미지와 달랐다. 내 시선을 끌었다. 한국에서 만나는 서양인의 이미지는 긍정적 이미지이다. 백인이 인터뷰하는 것을 보면 동양인이 하는 말보다 보다 더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것처럼 들니다.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들어와 있는 것일까 ? 밈(meme)일까도 생각했다. 밈은 생물학적 유전자가 개체에 영향을 주듯 문화심리에 영향을 주는 요소를 말한다고 한다. 부모의 여러 문화적 취양이 전달되고, 유전자처럼 복제 된다는 것이다. 이전 세대가 가져던 이미지와 생각들이 복제 된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부모로 부터 아니면 앞세대로 부터 받은 영향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서양인에 대한 우월적 이미지와 동양인에 대한 열등적 이미지 인것이다.
책을 보다가 내안에 새겨진 이미지가 미디어나 텍스트의 영향임을 추측 할 수 있는 내용을 발견하였다. 자연스럽게 생성된 생각이 아니었다. 백인의 의도와 관점이 보편적인 생각인것처럼 받아 들이게 만든 문화적 영향이 있었다. 옛날 신문에서 이런 기사가 있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제 3세계에 물조를 원조할 때, 수혜를 받으려면 국영 방송에서 미국 드라마 ‘타잔’을 적어도 2회 이상 방영해야 된다는 거였다. 물자 원조의 배후에 문화 공작이 있다는 것이다. 타잔을 보여 주면 강력한 문화적 감염이 일어 난다고 한다. 지상에서의 선의 표상이 달라진다고 한다. 타잔의 용모, 피부색, 사용하는 언어, 몸짓, 발짓이 그들이 도달하고픈 이상적 표본으로 된다고 한다. 미국인의 용모를 미적 가치의 척도로 삼게 만든다고 한다.(삶은 언제 에술이 되는가, 131p)
나의 생각은 만들어진 생각이었다. 타잔을 재미 있게 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생각 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책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설명하였다.
일본인 우치다 타츠르가 미국 영화인 <진주만>을 보고 미국인 주인공과 일본 비행사가 벌이는 공중전을 보면서 계속해서 미국 비행사의 승리를 바라고 일본 비행사가 조정하는 비행기가 추락하기를 기원합니다 홍콩 영화인 <정무문>을 보면서 악랄한 일본인 무술가를 때려 눕히는 이소룡의 활약에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어떤 영화평론가는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의 한 영화관에서 터져 아온 흑인 관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사례를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백인 선장으로 나오는 조지 라프트가 적에게 쫓길 때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짐짝’인 흑인노예를 바다에 던저버리는 장면에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에드가 모랭, ‘영화-또는 상상속의 인간)
인간이란 이런 존재 입니다. 우리는 확고한 견해를 가진 인간으로 텍스트를 읽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말한 영화의 예에서 보듯이 텍스트 쪽이 우리를 ‘그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주체’로 형성합니다…
텍스트와 독자는 사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매우 충격이 강한 책의 경우 마지막까지 읽은 다음 다음 성이 차지 않아 다시 읽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읽으면서 첫번째 읽을때 알아채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 읽을때 놓친 의미를 어떻게 발견 할 수 있을 까요 ? 그것은 그 책을 한번 끝까지 읽은 덕분에 우리의 견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즉 그 책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읽어 내는 “읽을 수 있는 주체”로 우리를 형성한 것은 텍스트를 읽은 경험 그 자체 였던 것입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137p )
의심하지 않고 받아 들이기만 하는 텍스트 읽기는 자칫 세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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