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미시정치학과 선분성: 거시정치와 미시정치(2/2)
선분성과 권력중심
분자적인 것의 흐름은 어던 끝을 갖는 것들이 연쇄적으로 연결되고 전염되며 증식하지만, 이웃한 분자들 간의 경계는 모호해지며, 흐름은 ‘대중’이 그렇듯 모호한 입자들이 하나로 이어진 연속체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선분이나 선이란 개념은 몰적인 것에 국한하고, 분자적인 것에 대해서는 양자라는 개념을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양자화된 흐름’ 이란 양자란 말로 개개의 분자의 입자적 구별을 표시하면서도, 선분적인 벽을 ‘터널링’하는 흐름을, 탈주선을 그리는 흐름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선분화된 선과 양자화된 흐름, 그리고 그 경계에 있는 권력의 중심이란 개념을 설병하기 위해 화폐 대중의 흐름과 화폐적인 선분들을 살펴 본다. 화폐 대중의 흐름은 포착할 수 없는 ‘미시적’ 흐름인 데 반해, ‘통화량’은 ‘money supply’로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본원통화와 은행에서 ‘신용차조’등의 방법으로 발생하는파생통화의 합으로 계산되는 ‘거시적’ 지표일 뿐이다. 화폐대중의 흐름이 그 선분적인 지표들에 쉽사리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통화량을 계산하는 지표들은 다르게 정의하여 사용한다. 하지만 화폐대중의 흐름은 그자체로 양자적인 흐름으로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통화지표’로 표시되는 통화량을 측정하고 그것을바탕으로 화폐대중의 흐름을 통제 가능한 화폐적 선분들로 변화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화폐대중의 흐름은어느새 부분적으로 그선분을 터널링해 빠져나가기 때문에 다시 새로운 선분화를 시도해야 한다. 이권력은항상 흐름의 양자를 포획하지만 어느새 벗어난 흐름이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끊임없이 실패하는 권력이다. 양자화된 흐름의 탈주선, 그것을 따라가며 선분화하는 권력, 그 결과 만들어지는 선분 그리고 거기서 다시벗어나는 양자화된 흐름의 순환이 일어난다.
뒤르켐과 타르드의 이론차이는 표상체계라는 거대한 몰적인 것과 믿음과 욕망의 흐름이라는 분자적인 흐름의 차이와 상응한다. 여기서 표상체계는 하나의 단어나 사물을 다른 것들과 연결하여 다시-나타나게 하는문화적인 조건을 말한다. 즉 뒤르켐은 개인이란 범위를 넘어선 사회적 사실에 속하고 몰적인 집합성을 갖는거대한 대상으로 한다고 본다. 가령자살과 같은 개인적인 행위조차도 사회적인 조건 속에 결정되는 것으로보았다. 반면 타르드는 분자적인 믿음의 흐름, 욕망의 흐름, 심리의 전염과 전파 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파악하고자 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타르드가 사용했던 접속과 결속을 다시 정의한다. 접속은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이 서로를 활성화 하고 그들 공통의 탈주를 자극하며 그 양자를 추가하고 가속하는 방식을 표시한다. 반면 결속은 오히려 그것들의 상대적인 정체를 뜻하고, 탈주선을 봉인하고 틀어막으며 일반적 재영토화를 작동시키며 다른 것들을 초코드화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지배 아래 흐름을 밀어넣는다. 사회적 장은 상이한 속도와 추세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종류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운동들에 의해 끊임없이 활기를 얻는다. 이는 모순이 아니라 탈주다. 권력이란 바로 대중의 문제로 이런 대중의흐름을 포착하여 그것을 선분화하는 능력에 의해 정의 된다.
초코드화는 선은 다른 선분들에 대한 한 선부의 우위를 확보하고서만 그려질 뿐이며, 다른 선분과 관련된 상대적인 공명의 권력을 그러한 중심에 부여하면서 그려질 뿐이고, 그 자신이 통과하는 지배적인 선분을 강조하면서 그려질 뿐이다. 집중화는 언제나 위계적이지만 위계는 언제나 선분적이다. 권력의 중심은 확산되고분산되고 감소되고 축소된 것으로 존재할 분이며, 끊임없이 치환되고, 미세한 선분화에 의해 활동하며 세부적인 것 안에서 작동한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제시했던 범죄의 흐름과 그것의 선분화로서 처벌이나감금의 양상에 대해 이야기 하며 재편과 축적, 도피와 탈주가 상충하며 역전을 야기하는 ‘불안정한 초점들’이 미시적인 권력의 중심들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교장이라는 중심의 형태를 취하지 않은 양자적인 흐름을 선분화하는 권력의 중심이 있다. 반장, 감시자, 우등생과 열등생, 수위 등등 그것이다. 분자적인 양상의 파시즘을 보여 준다. 이러한 미시적 중심들은 역으로 그 거대한 국가적 권력이 도대체 어떻게 일상적 삶의 저 미시적 요소들까지 촉수를 뻗치고 그것을통제할 수있는지를 보여 준다. 권력 중심은 가능한 한 흐름의 양자를 선의 선분들로 변환시키는 것을 그 존재 이유로 한다. 위대한 정치가란 무능력의 지대에 속하는흐름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흐름의 양자를 선분적인 선으로 변형시키고 초코드화할 수 있는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세 가지 선과 네 가지 위험
추상기계에 대해 먼저 살펴 본다. 추상기계에는 초코드화 추상기계와 변이의 추상기계가 있다. 초코드화 추상기계는경직된 선분성,거시적 선분성을 정의하는 추상기계이다. 초코드화란 하나의 코드 아래 모든 것을 통합하고 통일하는 것이다. 중앙권력이라는 위로부터 덮쳐오는 코드화가아니라 일차적으로 시장 내지 교환에서 오는 것이란 점에서 차라리 옆에서 혹은 발딛고 선 땅 ‘밑에서’ 덮쳐오는 코드화라고 해야 한다. 초코드화는 코드를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모든 코드들을 제거한다는의미에서 변형 내지 추상을 이야기 하지만 하나의 단일한 코드로 통합하기 위함이다. 프란체스코 파가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신항의 흐름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교황청 아래 다시 통합 했을때 흐름의 초코드화가진행되었던 것이다 . 이는 지층 안에서 진행된 변환이요. 다수의 지층을 하나의 지층안으로 통합하고 포획하는 추상이다.
변이의 추상기계는 선분화된 것을 흐름의 양자로 변환시키고, 양자적 흐름이 선분적 벽을 ‘터널링’하면서누수하고 범람하게 하는 변환과 상응하는 변이요 추상이다. 흐름의 창조 접속을 보장하며 새로운 양자를 방사한다. 그 자체로 탈주의 상태로 자신의 선위에 전쟁기계를 설치한다. 탈주선을 그리는 배치를 전쟁기게라고 한다. 경직된 선불들 사이로 흐르게 하고 다른 방향으로 분자 이하적인 것으로 흐르게 한다. 일관성으로이어지는 추상기계 이다.
밀접하게 뒤섞여 있는 세가지 종류의 선이, 부족과 제국 및 전쟁기계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이 세가지선은 첫째 서로 얽힌 코드와 영토성의 상대적으로 유연한 선. 이것이 영토 및 혈통의 선분화가 사회적 공간을 이루는 이른바 원시적 영토성에서 시작한 이유이다. 둘째 선분들의 이원적 조직으로 공명하는 원들의 동심성으로 일반화된 초코드화로 나아가는 경직된 선이다. 셋째 탈주선들로 양자에 의해 표시되며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에 의해 정의된다. 탈주선이야말로 가장 일차적이며, 그 탈주선의 자유로운 흐름을 선분화하는권력이 있고 그것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몰적 선분성의 선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푸코와의 차이를 요약하면서 추상기계는 탈주선을 가지며, 이것이 일차적이다. 이는 하나의 배치 안에서 저항이나 반박이라는 현상이아니라 창조의 첨점 내지 탈영토화의 첨점이다. 배치는 권력의 배치가 아니라 무엇보다 우선 욕망의 배치라고 하는 것이 이와 결부된 명제이다.
마지막으로 세가지 선과 관련된 네가지 위험에 대해 이야기 한다. 첫째 위험은 공포이다. 공포는 모든 상실에 대한 공포요 두려움이다. 우리는 반대편의 안전을 욕망한다. 몰적 선분안에서 획득한 것을 계속하여 소유하고 지속하게 하고자 한다. 욕망은 지속하려는 힘을 작동시키는 권력이기도 하다. 권력은 억압과 통제 이전에 욕망을 유인하는 검은 구멍이고, 욕망의 흐름을 절단하여 포획하는 거대한 칼날이며, 욕망의 흐름에 하나의 공정점을 부여하는 닻이다. 경직된 선분안에 안주하는 것이고 몰적 동일성/정체성 안에서 평안해하는것이다. 다른 모든 경직된 선분들을 자신의 삶으로 수용하고 받아 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울리히 백의 위험사회는 상실에 대한 공포를 자그갛여 안전성으로, 안전한 사회로 다시 - 돌아가고 싶다는 반성을 요구하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보수적 입장이다.
둘째 위험은 ‘명확성’이다. 분자적 선분성의 선에 고유한 위험이다. 명확성은 분자적인 유연한 움직임과 균열의 선을 명확하게 들여다 보려는 욕망을 의미한다. 욕망이 움직이는 미세한 양상을 포착하여 그것을 ‘긍정’하거나 그것을 ‘자극’하는 것 혹은 그것을 따라 가는 것이다. ‘욕망의 본령’인 성욕에 빠져드는 것이 그예이다. 가족적 제한을 넘어서 욕망의 대상을 끊임 없이 대체하며 따라가는 것(끝없이 ‘바람을 피우는 것’) 또 한 그 예이다. 이는 유연한 선분성이 경직된 것의 감정과 가식을 소규모 형태로 재생산할 위험을 감수해야하기 때문이다 . 모든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판사나 집행관, 경찰관 등의 사명을 부여하는 맹목적 빛이다.
세번째 위험은 ‘권력’이다. 양자화된 흐름을 선분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시도의 위험, 대개는 우리 자신이 양자화된 흐름에 대해 불안해 하거나 못마땅해하면서 그것에 안정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경우에 발견되는 그런위험이다. 무능력의 지대를 최소화 하려는 최소화하려는 시도 그리하여 탈주선을 멈추게하련느 시도이다. 당이나 노동조합이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무능력의 지대에서 발생한 학생 혁명을 프티 부르주아의 난동이라면서 원래 자리로 복귀할 것을 요구했던 68년 5월 혁명이 사례의 하나이다.
마지막 혐오 혹은 멸망의 정염의 위험이다. 탈주선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생성하는첨점이며 다른 삶으로 인도하는 선이다. 하지만 이러한 창조적 변이능력을 상실한 경우에도 탈주를 꿈꾸었던 욕망은 선분적인 벽으로 가득 찬 세계에 대한 혐오의 정염을 상실하진 않는다. 차라리 더욱더 강해지기도한다. 기존의 세계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없이는 새로운 삶의 흐름을 창출하고 촉발할 수 없다. 죽음의 선이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