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미시정치학과 선분성: 거시정치와 미시정치(1/2)
9장에서는 앞장에서 서술했던 세가지 선과 이어지며, 경직된 선분성의 선과 유연한 선분성의 선, 혹은 몰적인 선분성과 분자적 선분성이라는 두가지 유형의 선분성과 선분성 사이를 가로지르는 양자적 흐름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 탈영토화된 흐름을 포획하여 선분적인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선분마다 작용하는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미시정치학을 다루며 ‘대중’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계급이 몰적인 선분성의 선과 관련되어 있다면, 대중은 분자적인 선분성의 선 내지 분자적 흐름과 결부된다. 맑스주의 혁명이론에서 대중이란 중요한 개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의 자발성’이란 개념을 통해 당이나 조합과 같은 거시적 조직(몰적 조직)을 환원 불가능한 대중의 흐름을 포착하고자 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대중’이라는 개념을 확장해 피억압 대중 뿐만아니라 영주 대중, 부르주아 대중처럼 착취계급 뿐만 아니라 화폐처럼 흐름의 양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에 사용될 수 있다고 정의 한다. 이 지점에서 정치학의 중심문제는 욕망내지 믿음의 흐름과 그 흐름을 포획하는 선분성과 권력의 문제로 변환된다.
선분성의 양상들
선분성의 양상은 우리는 삶의 모든 곳, “모든 방향에서” 발견할 수 있다. 거주, 왕래, 노동, 놀이, 체험은 공간적으로, 사회적으로 선분화 되어 있다. 예컨대, 집의 방, 도시의 길, 공장의 작업은 모두 목적에 따라 도시의 질성에 따라, 노동과 작업의 성질에 따라 선분화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선분’은 시작과 끝이 명확히 분할되어 있다는 점이다. 명확한 절단에 의해 작동하는 ‘선분성’은 거기에 행동을 일치시키려는 명령어와 권력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미시정치학과 연관된다.
이러한 선분성을 세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 이항적 선분성이다. 거대한 이원적 대립에 따른 선분화로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선생과 학생 등이 여기에 해당 된다. 두번째 원환적 선분성이다. 선분들이 원환을 이루는 경우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구분되는 관계이다. 우리 가족, 내가 사는 동, 구, 시, 나라 처럼 영토적 개념과 나를 둘러싼 학년, 학교 등 동심원적 원환이 중간에서 분기하며 교차한다. 세번째 선형적(직선적) 선분성이다. 선분들이 절차를 표시하며 차례대로 배열되어 있는 선분화의 양상이다. 가족에서 학교로, 군대로, 직장으로하나의 절차를 끝내자 마자 다른 절차를 시작한다.
선분성의 두 유형
선분성을 형태적이 차이와 작동하는 양상에 따라 두 유형으로 구분 한다. 하나는 원시적인 유연한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적이고 경직된 유형이다. 이항적 선분성의 경우 원시 사회에서 차별의 강도, 분절의 강도가 휠씬 더 강할 수 있다. 가령 원시 사회의 남녀의 이항적선분성은 세개 이상의 선분을 통해 존속할 수 있는 이항적이지 않은 배치의 산물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원시사회에서 각자가 자신의 배우자를 다른 부족을 구해야 한다는 혼인규칙을 위해선 셋 이상의 집단이 존재 한다는 것을 전제 한다. 반면 근대사회에서는 이항적 선분성이 일대일 대응관계 및 계속적인 이항적 선택과 그 자체로 기능하는 이항적기계에 의해 작동한다. 3항성이나 그 이상의 항들을 이항성이 만들어 낸다. 근대적인 혼인규칙은 두 사람이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낭만적 사랑’이 된다. 하지만 동성애의 경우에도 이항적 선분을 통해 누가 남성 ‘역할’ 이고 여성 ‘역할’인가를 따진다. 이항적 선분성이 셋 이상의 분할을 규정하는 계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맑스주의 계급이론에서 계급은 본질적으로 둘이지만 셋 이상으로 분할을 규정할 수있다. 즉 두항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층이나 중간계급으로 3분할 된다. 하지만 중간층 역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환원 가능하다.
원환적 선분성의 경우 원시적인 유형은 원환적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이며, 그 중심을 둘러싼 원환적인 선분들도 복수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은 하나의 부족이 각자가 토템 동물을 갖는 여러 씨족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사이에는 모든 중심들이 종속되어야 할 특권적인 중심이 없다. 공명의 중심들이 분산되어 복수로 존재하기에 하나의 중심을 갖는 국가적 통일성이나 국가적 공명과는 다르다. 이와는 달리, 근대의 경직된 원환적 선분성은 단일한 중심을 갖는 동심원을 그린다. 봉건영주들이 나누어 가졌던 무력을 절대주의 이래로 국가가 독점하게 되듯이 말이다. 즉 근대 사회내지 국가에서는 동심원적인 것이 되며, 명확하게 수목화된다. 선분성은경직되고, 모든 중심적 얼굴은 국가적 중심이라는 단일한 중심을 ‘잉여성’으로 갖게 된다.
원시사회에서도 선형적 선분성이 있었지만 식사나 놀이의 선분, 사냥의 선분, 성인식이나 혼인식같은 제의의 선분들 이었다. 사냥의 선분이 놀이로 이어지거나 그것과 뒤섞이는 유연한 선분성이다. 하지만 근대적 유형은 경직되어 있다. 수업시간에 지켜야 할 원칙이 있고 그로부터 벗어나와경우 교정의 대상이 된다. 그 나름의 요건에 따라 교정하고 동질화하는 권력이 작동한다. 선분성을 강조하고 교정하며 동질화하는 메커니즘으로 인해 “선분들 사이에 등가성과 번영가능성이 있다” 공장의 규율에 훈련된 노동자는 조직활동의 규율에도 잘 따른다. 하나의 선분성이 등가적인 양상으로 번역되기 위해서 공통의 척도를 가져야 한다. 공통의 척도로 기하학을 대비한다. 원시적인기하학이 금내지 줄이고 동그라미라면 근대적인 기학은 엄격하게 정의된 선, 선분, 원, 도형 등을다루는 국가적 기하학이 된다. 이런 기하학은 하나의 척도, 혹은 한두개의 공리에 의해 모든 경우를 엄격하게 규정하고 ‘정리’하는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초코드화’라고 할 수 있다.
거시정치와 미시정치
유연한 선분성과 경직된 선분성을 원시사회와 근대사회로 나누어 표현했지만 유연한 선분성이원시인들에게만 할당하는게 아니라 경직된 선분성과는 뗄 수 없는 완전히 현재적인 기능이다. 이런점에서 모든 사회뿐만 아니라 모든 개인들은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이라는 두가지 선분성을 동시에 가로질러지고 있다. 몰적인 선분성을 통해 작동하는 것을 ‘거시장치’라고 하고, 분자적인선분성의 선을 통해 작동하는 것을 ‘거시정치’라고 한다. 모든 것은 정치적이지만, 모든 정치는 거시정치인 동시에 미시정치다.
첫 번째 거대한 이항적 선분으로 성을 다룬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오직 두개의 성과, 이성 간의 사랑이라는 단순한 선분성만으로 사람들의 실제 관계를 포착한다는 것은 매우 거칠고 단순화된 결과로 귀착될 수 있다. 남성적인 여자나 여성적인 남자가 존재하고, 남자가 다른 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오직 동성애라는 사랑관계로만 포착 할 수 없다. 거대한 이항적 집합인 성은 그것과 전혀다른 배치를 갖는 분자적 배치에 따라 수천의 작은 ‘성’들 즉 N개의 성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런관점에서 본다면 남성 안에 있는 여성적인 것과 같이 이항성을 중첩시키는 것조차 부적절 하다. 수천의 성들을 또다시 남녀의 거대한 이항성으로 쪼개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계급과 대중에 관한 것이다. 계급이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라는 거대한 몰적 이항성을 갖는 경직된 선분이다. 또한 사회적 계급들은 그 자체가 동일한 운동도 분할선도 동일한목적도 동일한 투쟁방식도 갖지 않는 대중으로 귀착된다. 이 대중을 부루주아 대중과 프롤레타리아 대중으로 절단한다. 대중이란 활동이나 힘의 흐름이고, 조건에 따라 각이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분자적인 움직임과 결부된 것이다. 맑스는 분자적 흐름에 하나의 일관된 방향을 부여하고 지배와착취를 전복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하고자 대중들을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하나의 계급으로 통합하려 했다. 이런 의미에서 몰적인 선분성은 나쁘고 분자적 성분성은 모두 좋다는 오해이다. 68혁명을 평가하면서 ‘분자적인 탈주와 운동은 몰적인 조직으로 되돌아 오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이 교차되고 섞이는 양상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분자적 욕망에 기초한 몰적 정치를 가동시키는 것이다.
세 번째 관료제 이다. 우리는 관료제를 연상하면 경직된 선분성을 떠올리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그 예로 20세기 건축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경우 이다. 그는 독일의 경직된 관련들에 의해 고생을 하다 프랑스로 건더 간다. 프랑스의 관료들은 법적인 규제의 선들을 유연하게 하여 그로하여금 프랑스 인디 되게 만들었다.
네 번째 파시즘과 전체주의다. 통상적인 생각과는 달리 들뢰즈와 가타리는 양자를 전혀 다른 것으로 본다. 전체주의가 사람들을 몰적 전체로 통일하고 통합하는 거시정치학적 개념이라면 파시즘은 분자적인 흐름이 밀려가면서 형성되는 미시정치학적 개념으로 정의한다. 전자가 국가적 차원혹은 몰적 전체성의 차원에서 공명을 만들어 내고자 하며, 후자는 국가가 제시하고 요구하는 것에공명하기 이전에 대중들 자신이 상호작용과 전염에 의해 번식되는 정치적 흐름이다. 유럽에 외국인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증오와 테러는 자발적으로 형성되고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파시즘을보여준다.
미시정치학은 분자적 욕망과 결부된 정치학이고, 대중이라고 불리는 흐름의 정치학이며 유연한선분성의 선 위에 이루어지는 정치에 대한 이론이다. 이와 과련하여 유연한 선분성에 오류들을 제시한다. 첫째 “약간의 유연성이 사태를 좀더 ‘낫게’ 하는데 충분하리라는 믿음” 이다. 파시즘의경우처럼 섬세한 선분화는 가장 경직된 선분만큼이나 해로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경직된 것이 나쁘고 유연한 것이 좋다는 생각을 버릴 필요가 있다. 둘째 “분자적인 것을 상상력의 영역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다만 개인적인 혹은 간-개인적인 것으로 돌려버리는 것” 이다. 분자들끼리서로 소통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움직이고 흘러가는 양상을 표현하기 위해 분자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개개의 분자로 흩어 진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분자적인 것은 개별적인 게 아니라 집합적인 것이다. 셋째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의 구별을 크기 상의 구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작음의 성질이 아니라 큼(mass, 대중!)의 성질에 의해 특정 지어진다. 넷 째 두 선의 질적 차이를 보면서 양자의 상호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미시정치와 거시정치가 대상을 달리하기에 서로 독립적이라는 생각은 오류이다. 이는 히틀러의 경우에 파시즘의 대중운동이 국가라는 거시정치적 장치를 장악한 것이나, 당이라는 몰적인 조직이 대중운동을 야기하는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분자적인 운동은 완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거대한 세계적 조직에 반하거나 그것을 헤치고 빠져나간다. 이러한 경우가 1968년 5월 혁명이다. 이는 분자적 상호작용에 의해 뜻밖의 방향으로 사태가진전되고 경찰과 대치한 상황에서 대중들의 토론과 소통으로 흘러갈 방향을 정했다. 이호 인해 대중적 흐름은 심지어 좌파 조직들의 벽에 의해 방해 받았다. 분자적 미시적 운동은 유연한 만큼 불안정하기에 새로운 출발을 위한 지반으로 응고시키는 능력이 취약하며, 혁명이 쟁취한 성과를 새로운 선분들로 굳히지 않고는 어느새 다시 뺏기고 원점으로 돌아가고 더 나쁜 지점으로 밀려갈 가능성도 있다. 분자적인 탈주와 운동은 몰적인 조직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성, 계급, 당의 이항적인 분포로, 그 선분들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대중의 분자적 욕망에 기초하여 계급적 운동과 계급혁명을 재정의하는 것, 그리고 대중의 욕망을 억합하는 것이 아니라대중의 욕망에 기초하여 당이나 당적 운동을 재정의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