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_가타리/노마디즘

6장 기관 없는 신체에 관하여: “인간은 자신이 본래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행복메모 2021. 12. 5. 14:47

 

 

1. 기관 없는 신체란 어떤 것인가?

알은 기관없는 신체이다.  알에서 기관이 발생하여 기관이 모인 유기체가 됩니다.  알의 표면에 주어진 조건과 자극에 따라  에너지가 상이한 강밀도로 분배된다. 그에 따라 신체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기관없는 신체는 ‘잠재성’ 차원의 개념이다. 들뢰즈 가타리에게 잠재성은 가능성과 달리 현실의 일부이다.  잠재적인 것은 형태나 형상이 현재적인 어떤 것으로 미리 결정 되지 않고 강밀도 양상의 현재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신체적인 힘의 강밀도가 끊임없이 그 분포를 달리 함에 따라 다른 기관이 된다. 

 

기관없는 신체는 유기적 지층에 질료를 대주는 출발점 이라기 보다는 그 유기적 지층을 탈지층화하여 되돌아 가는 어떤 목적지로 나타낸다.   탈 기관화하는 것, 기관으로서 할당된 고정성을 벗어나는 알로, 질료적 흐름으로  되돌아가 다른 종류의 '기관'이나 형상으로 변형될 잠재적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탈기관화된 신체의 표면에 새로운 흐름이 지나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가는 기관 없는 신체의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평소와 다른 신체의 힘을 이끌어내고, 각각의 기관은 평소에 하던 일이 아닌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동일한 양상의 삶을 반복하여 재생산하던 신체의 습속과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힘이다.  불자라면 업이라고 부르고 스피노자라면 코나투스라 부를 그힘을 벗어나 행동이나 삶의 자유로움을 획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요가를 통해 획득하는 것이다.

 

2. 잔혹연극과 기관 없는 신체

아르토는 ‘잔혹극’이라는 새로운 연극 개념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것을 벗어나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의 연극이 "인간의 습관화된 한계들, 인간적 능력의 한계들을 뛰어 넘도록 이끌며, 소위 현실이라고 불리는 것의 경계를 넘어  무한대로 발전하게 만든다"고 쓴다.  그가 말하는 잔혹성이란 '사물이 우리를 향해 끼칠 수 있는 것보다 휠씬 더 무시무시하며 필연적인 것'이다. 이는 강밀한 엄격함이나 무대적 요소들의 극단적인 응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잔혹연극이 신체를 겨냥하는 바는  낡은 습속에서 벗어난 신체, 모든 기관화된 사용에서 벗어난 신체라는 절대적 탈지층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탈지층화의 강도를 절대적 순수, 절대성에 이르기까지 밀고가려는 그의 문제의식 보여준다. 아르토에게는 연극이란 언어적인 텍스트에 따라 움직이는 ‘재현’ 행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신체적인 것이고 물질적인 언어를 통해 작동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하나의 이념이 되는 절대적 제스처의 순수물리학”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그 기능과 위치를 고정시키는 유기체에 반대하는 점이다.  유기화는 하나의 로고스 ‘일자’라고도 불리는 하나의 중심을 통해서 부분들을 통합하고 통일하는 것이고, 그 자리에서 특정한 하나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고정하는 것이다. 

 

3. 기관 없는 신체가 왜 ‘문제’ 인가?

기관 없는 신체란 모든 탈지층화 운동의 극한으로 그것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할 목표이다. 하지만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들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할 순 없다. 자칫하면 생성과 창조의 확장이 아니라, 죽음과 공허함으로 귀착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관을 제거하는 것이나 모든 지층을 파괴하는 것이 기관없는 신체를 만드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이는 기관없는 신체가 파괴의 이미지로 죽음으로 귀착될 실패의 이미지로 채색되는 이유이다.

 

 들뢰즈 가타리는 기관 없는 신체를 ‘죽음’이라는 추상적 관념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강밀도의 분포, 새로운 욕망의 배치를 생산하기 위해 스스로를 탈기관화하고 탈유기체화하는 것이다. 기관없는 신체란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잠재성 자체를 뜻하며,  어떠한 고정점도 고착화 된 것도 갖지 않는 욕망의 흐름 그 자체를 뜻하는 긍정적인 개념이다. 

 

기관 없는 신체가 죽음본능 내지 죽음의 모델로 간주될 위험마저 없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주어진 욕망의 배치에서 벗어난 새로운 욕망의 배치의 긍정적 형태를 갖지 못한다면,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드는 것은 모든 기존의 배치에 대한 파괴, 모든 기관 내지 유기체에 대한 부정과 파괴를 지향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 경우 자기자신의 파멸을 욕망하고 파멸능력을 갖기를 욕망하는 선을 그리며, 욕망은 죽음의 선을 그리게 될 것이다 .

 

4. 어떻게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들 것인가?

어떻게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들것인가와 관련해 들뢰즈 가타리는 신체의  문제를 두 가지 국면으로 구별한다. “하나의 국면은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한 국면은 이 기관 없는 신체를 무언가가 순환하거나 통과하도록 하는 것이다. 동일한 절차들이 두 국면 모두에서 쓰이고 있지만, 그것들은 되풀이되어야 하고 두 번 이루어져야 한다.

 

마조히트의 예에서 기관없는 신체를 만드는 과정을 두단계로 나뉘어 진행한다.  첫째 단계는 자신의 신체를 묶고 꿰메어 기관들을 ‘알’과 같은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그것에 새로운 욕망을 통과하게 하여 새로운 힘의 분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첫째가 유기적으로 통합된 이전의 기관들의 뷴포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둘째는 새로운 종류의 기관들을 형성하고 새로운 주체가, 새로운 ‘유기체’가 되는 긍정적인 구성 과정이다. 새로운 나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드는 문제가 기관이 제거된 텅 빈 신체를 만드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텅 빈 신체, 고통스런 신체를 만들지 않고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저자는 기관없는 신체를 만드는 것이 기관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정의되거나 예시되는 것은 신체를, 혹은 기관없는 신체를 기관으로 부터 충분히 추상히지 못해서 그런것이 아닌가 ? 의무이 있다고 한다.  오직 가시적인 형상을 통해서 이해하는 서구적 전통이 충분히 추상하지 못함이라고 한다. 반면 도교에서 기라는 개념, 불교에서 공인 오온이라는 요소들의 구성물로 세상을 이해한다면,  어떠한 가시적 형상이나 형태로부터 벗어나서 신체를 순수한 질료적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관들을 그대로 몸에 붙여둔 채 신체를 순수한 진료적 흐름으로 만드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신체의 기관들을 그대로 달고 있으면서도 항상 탕유기체화 되고 탈 주체화된 삶을 사루 있는 계기가 된다.  이런점에서 ‘기관 없는 신체’에 대한 질문은 사실 인도나 중국에서 이미 훨씬 오래 전에 던져진 바 있으며, 죽음에 이르는 음울한 길이 아닌 다른 종류의 길을 수행자가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 

 

5. 기관 없는 신체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

기관 없는 신체는 강밀도 제로인 상태로 모든 부분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다른 분포의 강밀도로 새로운 기관을 만들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갖춘 신체’ 상태 이다. 기존의 기관 또한 강밀도의 분포를 달리하면 전혀 새로운 기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걷는 기관인 발은 자신의 몸에 새로운 강밀도의 분포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기관’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 그림도 그립니다. 이건 그동안 자신이 사용하던 기관의 강밀도의 분포의 흐름을 바꿨다는 거다.

 

욕망은 강밀도에 방향과 질을 부여한다. 자신의 힘을 특정한 방향으로 사용하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어떤 욕망을 갖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속성을 갖는 기관을 지닌 신체로 바뀌는 것이다. 욕망에 따라 무수히 다른 양상의 기관 없는 신체들이 존재할 수 있다. 욕망은 각각의 질적인 속성과 유형안에서 무수히 많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많은 기관 없는 신체들이 모여 있는 거대한 기관 없는 신체가 존재할 수 있다. 그걸 스피노자는 ‘실체’라고 이야기 했다. 기관없는 신체는 욕망은 내재적인 능력이다. 질료적 흐름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원리나 이상이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강밀도의 흐름이 가로막히지 않도록 욕망의 긍정적 과정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신 분석학에서 욕망이란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본다. 고통이나 죽음도 방향만 다를뿐 쾌락과 동일 하다. 쾌락 획득으로 인해 진정되고 긴장이 해소 된다. 이는 자신의 욕망이 끝없이 흐르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이는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 시킨다. 우리는 욕망과 쾌락의 결속을 끊고, 기쁨이라는 스피노자적 감응에 연결 시켜야 한다.  이것이 긍정적 욕망의 지속과정이며 내재적인 기쁨을 위한 지속적인 생산의 과정이다. 이는 결여나 불가능성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쾌락에 의해 측정 되지도 않는다. 바로 이 기쁨이 공포, 수치, 죄책감으로 뒤덮이는 것을 막아 준다.

저자는 기쁨으로서의 욕망의 사례를 궁정식 사랑, 마조히스트의 자기 신체에 주는 고통, 도교에서 말하는 양생술을 언급한다.  이런 것들이 모두 욕망과 쾌락의 결속을 해체하고 있는 사례라고 한다. 궁정식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끝없는 헌신과 새로운 활동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마조히스트는 쾌락은 오직 고통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떤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지연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중국 도교에서 말하는 양생술 얘기도 마찬가지 이다. 지연을 통해 자신의 쾌락, 자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중단되지 않도록 만든다. 

6. 세가지 지층, 세가지 기관 없는 신체

우리는 지층으로부터 벗어나 기관 없는 신체가 되자고 한다. 저자들은 직접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지층을 세가지로 든다. 유기체(화), 의미화, 주체화가 그것 이다. 유기체라는 지층을 벗어나고자 하며 그것을 해체하고자 합니다. 다른 배치안에서 다른 종류의 신체와 기관을 갖는 것이다.  탈영토화에 신체를 개방하는 것이다. 의미화의 지층에서는 “기표와 기의, 해석자와 해석대상이 될 것임’ 요구하지만 기존 해석과 의미화에서 벗어나 일탈자가 되는 것이다. 주체의 지층은 “당신은 주체가 될 것이고, 주체로 고정될 것이며, 언표 주체와 포개진 언표행위의 주체가 될 것임” 선언한다. “탐구의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의식을 주체로부터 떼어 내는 것” 이다. 주체화를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거나 버려진 땅에 달라붙어 그것을 다른 종류의 공간으로 변환 시킨다. 

탈지층화는 위험을 안고 있다. 급속하게 너무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탈지층화를 시도함으로써 결국 자신을 파괴시키며 죽음에 이르게 된다. 소진시키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지층을 변환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탈지층화에 성공했지만 정작 새로운 기관들로 자신을 재구성하는 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면 결국 텅 빈 기관 없는 신체로 남게 된다. 기관 없는 신체와 일관성의 구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조야한 탈지충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들뢰즈 가타리는 “지층들을 흉내내라”고 한다. 기관 없는 신체에만 주목하고 모든 것을 환원해 버린 채 끝내려 할 때 현실은 폐허가 되고 기관 없는 신체는 작동을 멈춘다. “작은 분량의 주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지배적 현실에 대해 응수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말이다.

탈 지층화로 기관 없는 신체를 망치는 몇 가지 방식이 있다. 그것을 생산하는 데 실패하거나, 그것을 다소나마 생산하는 데 성공해도 그 위에서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으며 강밀도가 지나가지 않거나 차단되는 경우 이다. 정작 나쁜 것은 결국 이 상태에서 다시 지층이 덧씌우는 경우이다. 지층화 즉, 유기체이며 예속화된 채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지층들을 치매상태 내지는 자살적인 붕괴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다음 방식은 유기체적 지층을 파괴하여 죽음으로 인도하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기관 없는 신체이다. 암조직이 바로 그 그것이다. 지층안에 존재하며 지층을 파괴하며 모든 기관을 유기체의 기관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위한 기관으로 대체하는 신체이다. 의미화의 지층에 대해서도 암적인 기관 없는 신체가 존재한다. 이는 전제 군주가 발아하는 신체로서 어떠한 기호의 순환도 봉쇄할 뿐만 아니라 다른 기관 없는 신체상의 비-의미화하고 기호의 탄생도 저지한다. 주체화 지층도 암적조직을 갖는다. 이는 주체들 간에 남아 있는 어떤 구별도 금지함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것을 더욱더 가망 없게 만든다. 

암적인 기관 없는 신체는 파괴와 죽음을 욕망하는 신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도 ‘욕망’이 작동한다. 암적인 기관 없는 신체는 텅 빈 신체와 달리, 파괴의 욕망을 갖는다. 그것이 지나치게 급작스런 탈지층화에 의해 공허 속으로 떨어지거나, 혹은 암적인 지층의 증식에 빠져들 때조차 그것은 여전히 ‘욕망’이다. 욕망은 그토록 멀리까지 뻗어나가, 자신의 파멸을 욕망하거나 파멸의 능력을 갖추기를 욕망하기에 이른다. 화폐에 대한 욕망, 군대의 욕망, 경찰의 욕망, 국가의 욕망, 파시스트적 욕망, 심지어 파시즘도 욕망이라고 말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세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충만한 기관없는 신체, 텅 빈 기관없는 신체, 암적인 기관 없는 신체이다. 먼저 충만한 기관 없는 신체는 일관성의 구도상에 있으면서 욕망의 내재적 장으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열려있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신체이다. 텅 빈 기관 없는 신체는 지나치게 성급하고 폭력적인 탈지층화로 모든 지층과 기관을 상실해버림으로써, 다른 양상으로도 변화하지 못하며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무능력한 신체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암적인 기관 없는 신체 이다. 파괴 능력이 극대화된 신체로서 자신의 모든 지층을 파괴하면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신체들을 암적 신체로 바꿔버리는 신체이다. 

7. 기관없는 신체와 일관성의 구도

기관 없는 신체 간의 구분, 선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일관성의 구도’라고 한다. 일관성의 구도란 어떤 양상의 신체도 될 수 있는 잠재성의 지대를 표시하는 표지판 이다. ‘일관성의 구도’에서 만들어지는 기관 없는 신체와 그렇지 않은 신체들을 구분할 수 있다는 거다. 그것은 그것을 그리는(trace) 추상기계를 통해 선별한다. 일관성의 구도상에서 어떤 욕망을 흐르게 함으로써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방식과 죽음의 선으로 이어지는 파괴와 파멸의 방식이다. 심지어 하나의 기관 없는 신체 안에서도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예컨대 마조히즘의 신체든 약물중독의 신체든 내부에서도 우리는 ‘일관성의 구도’ 상에서 구성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관없는 신체를 이루기 위해 새로운 ‘배치’들을 만들어가고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을 제안한다. 여기저기서 흐름의 통접을 확보하고, 선분마다 강밀도의 연속체를 이루려고 시도하며, 또 언제나 새로운 대지의 조그마한 부분들을 가져라. 탈주선들을 자유롭게 하고, 통접된 흐름이 지나가고 탈주하게 하며, 기관 없는 신체에 지속적인 강밀도를 해방시키는 데 이르는 것은 ‘지층들과의 신중한 관계’를 통해서 이다.  이것이 여전히 의미화하고 주체적인 프로그램에 대립하는 전체 다이어그램 이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더욱 깊숙한 배치들로 거슬러 올라가 배치를 슬그머니 뒤집어서 일관성의 구도 쪽으로 넘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