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언어학의 외부(2/2)
노마디즘1 4장에서 언어학의 4개의 공준 비판한다. 3, 4번째 비판이다.
3. 언어를 동질적인 체계로 정의할 수 있게 해줄 보편성과 항상성이 존재하리라
레비-스트로스는 언어학이 인문과학에서 ‘유일한 과학’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항대립적인 변별자적 개념을 가족관계나 신화의 분석에 사용하고 나아가 그러한 관계의 양상을 과학적으로 포착한다. 소쉬르는 파롤의 가변성과 개별성에 대립되는 랑그(언어)구조의 불변성과 보편성을 언어학의 진정한 대상이라고 보았다. 촘스키는 언어활동의 개별적인 수행성과 대립되는 인간의 보편적인 언어능력을 가정하고 그로부터 언어언구조의 이항적인 수형도를 그린다. 그는 사람들이 이 이질적인 전체 안에서 원칙상 과학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해줄 동질적이거나 표준적인 체계를 추상화나 이념화의 조건으로서 마름질해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를 상수의 체계로 다루는 촘스키와는 반대로 변인의 체계로 다루는 라보프를 주목한다. 라보프는 자신의 관심은 언어의 가변적 특징이다. 언어 활동에 내재하는 변이를 주목하고 그것을 통해 언어 활동 자체를 포착하려고 한다. 언어활동이란 언제나 상이한 언어들을 넘나드는 끊임없는 변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흑인 영어에서 표준적인 영어로 18번이나 넘나 드는 흑인 청년의 예를 든다. 촘스키라면 동일한 언어체계가 다른 방식으로 수행 또는 발화되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고 라보프는 상이한 언어들을 넘나드는 변이로 보았을 것이다. 우리들 일상도 상이한 언어들을 넘나 든다. 강의할때 쓰는 언어, 연애할때 쓰는 언어, 어릴적 친구들을 만나서 쓰는 언어 등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끊임 없이 넘어간다.
모든 체계는 변이 속에 있으며 그 상수와 동질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내재적이고 계속적이며 매우 특정한 방식(가변적인 혹은 임의의 규칙)으로 규제되는 가변성에 의해 정의 되어야 한다. 하나의 언어안에서 작용하는 이 계속적 변이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
언표로 하여금 음운론적이고 통사론적이며, 의미론적이고 운율론적인 것 등의 변인들의 연속체로 언어활동을 정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적 변화를 연속적인 변이속에서 포착한다. 언어 활동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음색과 음조, 음고, 표정 등의 연속적인 변이에 의해 만들어지는 활동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언어적인 변화나 언어 외적인 변수들이 체계적 단절보다는 오히려 주파수의 점진적 변용에 의해 상이한 용법의 공존과 연송성에 의해 하나의 화행적인 복합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언어 활동을 정의 한다.
4장 제목이 반음계주의 입니다. 반음게 주의는 연속적인 변이로서 언어 활동을 포착하는 것이다. 언어를 기표와 음고, 음색, 어조 등등의 연속체로 정의하는 것이며 언어 활동을 다양한 변수들의 복합체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를 ‘일반화된 반음계주의’ 라고 부르는 언어학적인 추상기계로 귀착된다. 음악에서 반음계주의란 온음계에 없는 반음들을 온음계에 넣어서 사용하는 것을 지한다. 온음계에는 장조와 단조가 있으며 7개의 음으로 이루어져 있고 미와 파, 시와 도사이에만 반음이다. 피아노 건반중에 검은 건반이 없는 음이다. 나머지는 모두 온음이다. 이 음만으로는 표현력에 제한이 커서 선율에 색채감을 주기위해 또는 화성에 표현력을 더해주기 위해 원래 음계에 없는 반음들을 사용하는 것이 반음계 주의이다. 어떤 의미를 표현할때 필요하다면 원래 음계에는 없는 반음들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옥타브 안에 있는 12개의 모든 반음으로 확장하여 모든 음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반음 단위로 분절된 소리를 넘어서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가는 경우 ‘일반화된 반음계주의’라 할 수 있다. 모든 음을 글리산도이다. 첼로나 바이올린은 미부터 라까지 쭉 이어서 모든 소리를 연속해서 내는 것이다. 온음이나 반음 단위로 분절된 음 사이에 모든 소리를 사용하게 된다.
반음계주의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언어활동을 파악하는 것이 반음계주의적 언어학 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언어학적 추상기계는 음고, 음색, 볼륨, 강세, 억양, 속도 등의 복합체인 소리 자체를 변이시킴으로써 뜻하는 바를 표현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언어활동이나 언어를 보편성과 항상성, 불변성을 갖는 언어 내적인 구조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비언어적인 성분들을 포함하는 변이의 연속체로 다루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인 규칙을 다루는 언어학과 특정한 양상의 언어(활동)을 다루는 문체론을 이원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문체는 개인적인 심리학적 창조물이 아니라 언표행위의 배치 이기 때문에 언어 안에서 언어를 만들어 낸다.
문체라는 형식의 변이선을 가동시킴으로써 새로운 표현형식, 새로운 ‘언어들’을 창안해 낸다. 이렇게 함으로써 문법적인 언어의 보편성을 상대화 시키고 약화시킨다. 보편성과 충돌하지만 그것과 나란히 ‘정당한’ 지위를 갖는 언어들이 생동하고 생성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 이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를 더듬거리게 하기’라고 부른다. 특이한 문체나 심지어 문법의 규칙을 깨고 종종 비의미화되는 언어들은 그자체로 언어 안에서 더듬거리는 것이 분명하다. 더듬 거림이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고유한 표현 능력을 획득할때 다시 말해 고유한 문체를 형성하는 어떤 나름의 일관성을 획득할때 그것은 단순히 더듬거리기를 넘어서 문법적인 언어 자체를 더듬거리게 한다고 할수 있다.
4. 다수적인, 혹은 표준적인 언어 아래서만 언어는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으리라.
마지막 비판은 다수적 언어와 표준어에 관한 것이다. 표준어에 의한 언어의 통일성은 무엇보다 정치적이다. 권력에 의해 표준어가 된다. 표준어는 교육에 의해서든 매체에 의해서든 원래 그 언어를 사용하지 않던 사람들에게 사용하도록 하며, 다른 지역이나 지방의 언어활동이 맞추어야 할 모델이 된다. 이는 말을 듣는 사람은 물론 말을 하려는 사람에게도 특정한 양상으로 말하도록 요구한다. 이는 항상적인 것과 항상적인 관계를 추출하려는 과학적 시도는 언제나 항상적인 것 간의 관계를 말하려는 사람에게 부과하고 명령어를 전달하려는 정치적 시도와 겹쳐져 있다. 규범적인 개인으로서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사회적 법에 종속되기 위한 전제라고 할 수 있다.
표준어가 많은 사람에 의해 사용되는 것은 그것이 표준어로 정해졌기 때문이고 언어활동의 척도라는 지위를 차지 했기 때문이다. 다수가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수성은 항상적인 것의 권력에 의해 정의 되며 척도의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 것이며 그렇기에 권력을 확장할 통로를 다수 확보하여 다수성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소수적인 언어는 다수적인 언어를 변형시키고 변이 시키는 성분이며, 새로운 종류의 언어를 생성하는 언어이다. 다수성은 단지 수가 많다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소수성 역시 수가 적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수적 양식에서도 소수적 양식에서도 언활동의 본질이 잉여성이라고 했던 ‘명령어’라는 점에는 다름이 없다. 명령어는 하지 않으면 죽어로 귀착되는 선고의 문장이 된다. 언어라는 표현의 층위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신체적인 층위, 즉 내용의 층위와 만나 하나로 연결된다. 하나의 신체가 다른 신체와 나누어지고 구별되는 것은 언제나 비신체적인 어떤 것에 의해서 였다. 형상이 신체의 극단인한 형상은 신체를 제한하고 완성하는 비신체적 속성이다. 죽음은 형상이다. “끊임없이 신체로 귀속되는 비신체적 변환”으로서의 언어활동, 그것은 탈주선을 그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죽음과 반대방향의 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죽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축소시키고 그 자체를 변이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
여기서 저자는 보르헤스의 소설 <죽지 않는 사람> 떠올린다. 불사의 존재란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이 되는 존재며, 다른 것이 되는 삶 그자체인 것이다. 다양한 삶을 살게된다. 불사의 존재란 끊임 없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이 되는 존재며 다른 것이 되는 삶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다 “불사의 존재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다른 삶으로 변환되는 그 문턱을 긍정할 수 있다면 변이 자체를 긍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매순간 불사의존재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변이에 대한 공포가 ‘나’를 그 앞에서 멈추게 한다. 문턱이 요구하는 것을 ‘나’의 종말인 치명적 죽음으로 받아 들이게 된다. 이 경우 죽음이란 그 앞에서 도망쳐야 할 어떤 극한, 다시 말해 그것을 면하기 위해 현재 요구되는 명령어를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극한이 된다. 우리는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보는 “ 방식으로 나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명령어를 받아들이고 실행한다. 그것이 바로 명령어가 죽음에 잇닿아 있다는 말의 의미일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들은 죽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불사의 존재다. 그것은 나에 대한 집착, 현존하는 나의 삶, 현존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집착을 던져 버림으로써 무한한 변이의 과정 속에들어 가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이질적인 삶의 형태를 긍정하는 것이다. 이를 보르헤스는 ‘만인이 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문제는 명령어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사형선고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고, 탈주의 능력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이다. 명령어의 혁명적 잠재력을 어떻게 유지하거나 살려낼 것인가”. 명령질서를 이행의 성분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다수적 권력에 의해 항상-이미 장악되어 있는 언어의 지층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패스워드’ 라고 말한다
명령어의 잠재력을 탈주의 능력으로 전환시킨 훌륭한 사례를 사파티스타인 마르코스의 ‘아름다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로 번역된 책이다. 마야인 원주민들의 시적언어, 혹은 딱정벌레 두리토를 앞세운 유머러스한 언어는 반란군이나 게릴라 혹은 세계화된 자본주의와 전쟁이라는 자칫 무겁고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에 뒤덮이기 십상인 삶의 지대를 밝고 유쾌한 웃음으로 채색하면서 산아래 있는 사람들, 바다 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제안한다. 이 유쾌한 제안의 말속에 ‘명령어’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어”라는 사형선고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라는 패스워드로,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국가장치의 억압에 의해 자본의 착취에 의해 경직되고 고착된 몰적인 삶에 의해 압살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패스워드로 바꾸어 놓고 있다. 이렇게 명령어는 새로운 종류의 삶을 꿈구는 혁명, 새로운 종류의 혁명을 꿈꾸는 전사들의 무기가 된다.
삶에는 일종의 서투름, 병약함, 허약한 체질, 치명적인 말더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혹자에게는 매력이 됩니다. 스타일이 글쓰기의 원천이듯이, 매력은 삶의 원천 입니다. 삶이란 당신의 역사가 아닙니다. 매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도 없습니다 … 삶이 개인적이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글쓰기는 제 안에 목적을 갖지 않습니다. 글쓰기의 유일한 목적은 삶입니다. 글쓰기가 이끌어내는 조합들을 통해 삶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것이죠(p.14~15, 들뢰즈, 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동문선,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