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_가타리/노마디즘

4장 언어학의 외부(1/2)

행복메모 2021. 11. 23. 23:08

노마디즘1 4장은 “ 언어학의 외부: 반음계주의적 언어학을 위하여” 이다. 제목으로 부터 언어학과 관련된 내용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장에서는 기존 언어학의 기본적인 출발점을 이루는 자명한 공준들을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전의 공준들이 다수성과 표준적인 형태 아래서만 언어 활동을 연구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며, 그에 따라 척도로서 작용하는 어떤 특정한 ‘권력’을 가정하거나 작동시키는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제한된 범위내에서 받아 들일 수 있는 공준이다. 4개의 공준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1.  언어활동(langage) 정보적이고 소통적이리라

여기서 언어활동은 랑가주(langage)의 번역이다. 랑그(langue)는 언어이다. 소쉬르는 랑가주를 랑그와 파롤의 합이라고 정의한다. 랑그가 어휘나 문법을 비롯하여 언어 사용에 관련된 일반적인 사회적 규약이라면, 파롤은 개별적으로 그때마다 입으로 발음하는 것을 지칭한다. 랑가주에는 랑그에 파롤같이 현실적인 언어를 사용하는게 포함된다. 랑가주는 이러한 실천 활동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언어활동이라는 번역하였으며, 이와 대비해 언어적 규약들의 집합으로서 랑그를 ‘언어’라고 번역 한다.

언어활동의 본질은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이나 의사를 전달하고 소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도록 시키고 명령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여선생이 학생들에게 문법규칙이나 산수를 가르칠때,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듯이, 그녀가 질문할 때에도 알려 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녀는 가르치며 명령하고 지시한다. 선생의 지시는 그녀가 가르치는 것에 대해 외적인 것도, 부가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최초의 의미작용에서 흘러 나오는 어떤 것이며 정보로부터 결과하는 것도 아니다.” 산수 시험은 명령을 잘 알아듣고 따르는지를 시험하는 것이고 책에 있는 연습문제는 그런 명령에 따르는 훈련을 위한 것이다.

“언어활동의 본질은 명령이다”를 모든 것을 권력으로 환원하려는 삐닥한 니체주의적 반항이라고 여길지 모른다. 권력이니 명령이니 하는 말만하면 모든걸 삐딱하게 보는 반계몽주의자 내지 포스트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이런 발상이 계몽에 대한 무정부의적 비판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건축가] A는 건축용 석재들을 가지고 어떤 하나의 건물을 짓는다. 벽돌, 기둥, 석판, 들보 등이 있다. [조수] B는 그에게 그 석재들을 건네 주어야 한다. 더구나 A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순서에 따라. 그 목적을 위해서 그들은 ‘벽돌’ ‘기둥’, ‘석판’, ‘들보’란 낱말들로 이루어져 있는 어떤 하나의 언어를 사용한다. A가 그 낱말들을 외친다. 이렇게 외치면 B는 가져오도록 배운 석재를 가져간다 - 이것을 완전히 원초적인 언어라고 생각하자”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

‘벽돌’등과 같은 말의 목적이 그 단어와 결부된 어떤 표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비트겐 슈타인 언어가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에 반응하는 활동임을 명확히 한다.

“어린 아이가 말하는 법을 배울때, 어린아이는 원초적 형식의 언어를 사용한다. 여기에서 언어를 가르치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훈육이다. 어린 아이들은 이러한 활동들을 하고 그와 동시에 이러한 낱말들을 [이렇게] 사용하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낱말들에 이렇게 반응하도록 교육받는다.”(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

들뢰즈/가타리는 언어활동의 기본단위를 언표라고 한다. 언표는 진술하다. 서술하다. 선고하다 등을 뜻한다. 기표나 기의, 랑그나 파롤, 혹은 음소나 형태소를 언어활동의 기본 단위로 보는 것과는 구별된 입장이다.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에서 제시한 개념어이다. 예를 들면 ‘I am cold”와 ‘추워’라는 말은 전혀다른 기표, 음소와 형태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혀 다른 두개의 랑그를 따라 진술되었지만 하나의 동일한 언표이다. 의미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기의처럼 보이지만, 기의가 기표와 작을 이루는 개념이란 점에서 이 말들은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기의 또한 아니다.

언표 행위는 단지 음성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것 까지 포함하며,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언표를 수반하는 행위 일반을 지칭한다. 글이든 말이든 침묵 조차도 ‘언표행위의 배치’ 안에 있으며, 그러한 배치안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언표는 “효과를 겨냥한 기호들의 집합” 이다. 들뢰즈/카타리는 언표란 우리의 언어 활동에서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달라고 하는 일종의 명령이 언제나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았다. 모든 말에 명령어가 ‘잉여적으로’ 부가 되어 있다. 명령어는 직접적인 언표나 정보에 추가되는 것이란 점에서 잉여적인 것이지만, 망실에 대비해 덧붙이는 추가적인 정보가 아니라 반대로 잉여적인 것(명령어)를 전달하기 위해 직접적인 언표를 사용한다. 잉여성인 명령어를 전달하는 것이 언어 활동에서 가장 중요하다.

저자들은 잉여성에 대한 얘기를 좀더 밀고나간다. 거기서 주파수와 공명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잉여성은 주파수와 공명이라는 두형식을 갖는데 전자는 정보의 의미화에 관련되고 후자는 소통의 주체화에 관련된다. 정보의 의미하는 주파수 변화 즉 어떤 음고, 어떤 어조에 따라 즉 어느 주파수의 소리로 말하는 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공명은 함께 울린다는 뜻으로 누군가의 발언을 나에 관한 것으로 동일시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재정의 한다. 소통이란 이런 주체화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명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본다. 정보와 소통도, 혹은 주파수와 공명도 모두 특정한 사회질서 안에서 명령어의 전달과 그에 대한 동조를 야기하려는 것이란 점에서 잉여성에 종속된다. 지배적인 의미작용에서 독립적인 의미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존의 예속화의 질서로 부터 독립적인 주체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명령어로 돌아간다. 명령어를 내포하는 언표나 언표행위 그 자체로 비신체적인 것이고 표현의 층위를 형성한다. 대답하는 언표행위는 그 자체로는 비체적 변환이지만 신체적 변환을 야기한다. 피고를 죄수로 변환시키는 것은 판사의 선고로 비신체적 속성이다. 전쟁의 총동원의 선포도 비 신체적 변환을 표현하지만 신체에 속하는 비신체적 변환입니다.

언어 활동은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삶에 명령/질서를 제공합니다. 이 점에서 “문법의 규칙이라고 하는 것은 통사적 표지기 이전에 권력의 표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언어 활동을 다루는 것을 화용론이라고 한다. 화용론은 권력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란 점에서 언어의 정치학이라고도 한다. 화용론은 행동과의 관계에서 언어활동을 다룬다. 말과 행위의 내적 관계를 보여 주며 언어 자체가 그것을 사용하는 활동에 의해 의미를 갖게 되며, 활동 역시 그에 결부된 언어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언어활동을 행동이나 활동과 결부하여 파악하는 이런 관점을 통해 저자들은 세가지 결과가 나온다고 말한다. 첫째 동일한 단어와 동일한 문법적 규칙, 요컨데 동일한 코드를 통해서 만들어진 완전히 동일한 문장이 그와 결부된 외부, 즉 행동이나 활동, 혹은 조건이나 맥락등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둘째로 화용론과 분리해서는 의미론이나 통사론, 심지어 음운론조차도 언어에 대한 과학적 지대로 정의 할 수 없다. 셋째 랑그와 파롤의 구별을 유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파롤은 랑그에 추가되는 개별적인 편차가 아니라, 랑그 자체의 수준에서 의미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2.외생적인 어떤 요소에 호소하지 않는 언어라는 추상기계가 존재하리라

언어를 오직 언어 구조로 환원하려는 입장을 비판 한다. 이에 대한 내용보다는 배치의 4가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모든 배치는 내용과 표현의 층위를 갖는 동시에 영토성(재영토화)과 탈영토화를 갖는다. 신체적인 것이 내용의 층위에 해당한다면, 비-신체적인, 언어적인 것은 표현의 층위에 해당한다. 표현의 형식은 표현자의 연쇄로 구성되며, 내용의 형식은 신체라는 씨줄에 의해 구성된다. 칼이 고기를 자를때, 음식이나 독이 신체에 퍼져갈 때, 한 방울의 포도주가 물에 떨어 질때, 거기에는 신체의 혼합이 존재한다. 하지만 ‘칼이 고기를 자른다”, “나는 먹고 있는 중이다”, “물이 빨갛게 된다”와 같은 언표는 전혀다른 성질(사건)의 비신체적 변환을 표현한다.

내용과 표현이 독립적이지만 무관한 것은 아니다. “고기를 잘라’라는 말은 이미 그 자체로 특정한 신체에 속하는 것이다. “고기를 따’라든가”, “고기에게 옷을 입혀”라는 말은 문법상 문제가 없지만 무의미한 문장이다. 언표가 표현하는 어떤 신체 상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고, 신체 상태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비신체적 변환과 비신체적 속성은 신체 그자체에 대해 오직 그것에 대해서만 해당될 뿐이다. 그것은 언표라는 표현자지만 신체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체를 표상하거나 기술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체는 이미 고유한 질을, 능동과 수동을, 그 영혼을, 한마디로 말해 그 자체로 이미 신체인것을 갖고 있다.

표상 또한 신체의 일부다. 그렇기 때문에 언표 내지 언표 행위는 그 자체론 비신체적이지만 신체적 상태에 ‘개입’하여, 신체적 변환을 야기한다. 비 신체적 변환인 언표행위가 신체에 귀속된다고 말하는 것은 기호나 언어를 지시체의 형태로 신체와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신체적인 것에 관여하고 개입하여 그것의 상태를 변환시키는 것을 뜻한다. 비신체적 속성을 표현할때 동시에 그것을 신체에 귀속시킬때, 우리는 표상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개입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화행이다.

언어는 어떤 신체 상태에 귀속되어 있지만(영토화) 그로부터 벗어나 그 신체의 변환(탈영토화)를 야기하는 언표가 된다. 요컨대 내용과 표현 혹은 신체와 언어는 서로 상응한다기보다는 상관적이지만 각각 자신의 어떤 상태로 부터 탈영토화하는 방식으로 상대방과 소통한다. 표현의 형식과 내용의 형식이 소통하는 것은 서로에 대해 개입하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잇따르는 상대적인 탈 열토화의 양자적인 결합에 의한 것이다.

내용과 표현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용은 표현을 인과적인 작용에 의해 결정하지 않는다. 또한 내용과 내용의 형식은 동일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표현과 표현의 형식 또한 동일하지 않다.

내용이 경제적이라고 해도 내용의 형식이 경제적이라고 할수 없으며, [내용의 형식은] 단순한 추상으로, 재화의 생산 및 생산수단을 그 자체로 고찰할 수있게 해주는 단순한 추상으로 환원된다. 마찬가지로 표현이 이데올로기적이라 해도 표현 형식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아니며, [표현형식]은 추상인 언어활동, 공동선의 처리 수단인 언어 활동으로 환원된다. 마찬가지로 표현이 이데올로기적이라 해도 표현의 형식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아니며, [표현형식은] 추상적인 언어활동, 공동선의 처리수단인 언어활동으로 환원된다.

또 하나의 오류는 언어학적 체계로서 표현형식의 충분성을 믿는 것이다. 기호들은 항상-이미 서로를 전제하며 하나의 구조 내지 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이를 언어의 공시적 체계 내지 언어의 공시성이라고 부른다. 의미는 이러한 체계 안에서 기표들 간의 놀이에 의해 만들어 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호들의 체계와 그 의미망은 자체로 독립적이어서, 기호나 언어를 사용하려는 사람은 항상-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사용해야 하며, 그러한 기호체계에 내장된 의미망에 의해 제한되고 규정된다고 한다. 이를 라캉은 기표가 그걸 사용하려는 사람에게 물질적인 힘을 행사한다는 의미에서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부른다.

의미화는 음운론적 구조로서 혹은 심층적 통사구조로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경우든 그 체계는 의미론을 발생시키며 표현을 충족시키는 미덕을 가질 것으로 간주되며, 내용은 단순한 지시의 자의성에 자리를 넘겨주고 화용론은 비언어적 요소로서 언어에 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 모든 시도에 공통적인 것은 언어라는 추상기계를 정립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기계를 항상적인 것의 공시적 집합으로 만드는 것이다. (MP. 114~15:I, 96)

‘구조언어학’ 은 언어를 그 자체로 독립적인 하나의 공시적 체계로, 하나의 구조로 간주하며, 그것이 바로 모든 언어 활동에 공통된것이라고 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언어에 공통된 이런 구조를 자신들의 개념을 써서 일종의 언어적인 ‘추상기계’라고 말한다. 그들은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한 면을 비판합니다. 비언어학적 요인을 떼내어 언어학적 요인 그 자체만을 추상하며 언어학적 요인을 상수로 다룬다는 것이다.

언어들에 공통된 어떤 형식을 추상하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탈형식화하는 방식으로 추상화함으로써 언어적인 활동의 입자적이고 양자적인 수단으로까지 나아가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언어학 자체가 그 고유한 요소들에 관련된 화용론과 분리될 수 없다. 진정한 언어적 추상기계는 언어적인 것이 아니라 다이어그램적인 것이며,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초선형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추상기계는 배치 전체와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배치의 다이어그램으로 정의 되기 때문이다. 내용은 기의가 아니며 표현은 기표가아니다. 양자모두는 배치의 변수들이다.

예를 들어 ‘오늘밤’ 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30가지 이상의 상황을 표현해보라고 한다. 음고나 음색, 어조, 표정 등에 의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화한다. 바로 그러한 요인들 때문에 같은 기표의 단순한 문장을 사람들은 크게 틀리는 일 없이 다른 문장, 다른 의미로 알아 듣고 이해한다. 언어 외적인 요인들, 비언어적인 요인들을 이미 그자체에 포함하고 있다. 소쉬르는 기호의 선형성(선조성)을 이야기 한다. 순간에 두개의 발음을 동시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표의 발음에 사용되는 음조와 음색, 음고, 표정 등의 성분이 하나의 동일한 시간에 동시에 발음되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다. 기표는 선형적일지 모르지만 언어는 동시에 여러가지 성분이 한꺼번에 발화된다는 점에서 초선형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