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장 차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천의 고원>, 혹은 철학적 음악 ?
누군가 "『천의 고원』을 어떻게 읽으면 이해하기 쉽겠는가" 고 질문하자. 들뢰즈는 "오디오에 음반을 걸어놓고 듣듯이 읽어 달라" 고 한적이 있다고 한다. 웃자고 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의 책을 음악 듣듯이 들어달라고 주문하는 것은, 책의 리듬을 타고 읽어달라는 것이고, 그리듬을 타는데 익숙해지면 그가 말하려는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가령 수영을 한다는 것은 물의 리듬을 타는 것이고, 그 리듬에 자신의 리듬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리듬을 탄다는 것은 '이해'나 '인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무엇인가를 제대로 실행할 수 있는 능력과 결부되어 있다.
책을 읽는 것은 단순히 그 내용을 읽고 이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감각을 촉발하고, 우리의 감각과 정서를 변용시켜 새로운 사유의 리듬에 적절하게 감응하게 한다. 신체의 표면에 새겨져 있는 무의식적인 삶의 감각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 내다. 감각이 바뀌면 새로운 탈주의 선을 탈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가 『천의 고원』에서 말하는 책이란 그 책이 가지는 리듬을 통해 자신이 가진 기존의 삶의 리듬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천의 고원>에 이르는 길
1) 1968년 이전
철학자들이 만들어냈던 다양한 사고의 선들, 새로운 창조적 사유의 선들이 어떤 하나의 틀 속으로 수렴되거나 갇혀버리게 되고, 결국 그들이 각각 만들어 냈던 다양한 창조와 변이의 선들은 망실되고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다.
"모순보다 더 심오한 차이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라는 문제 설정 속에서, '존재'가 아닌 '생성'을 사유하는 것, 무한한 '생성'을 사유할 수 있는 '내재성의 장'을 철학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것이 들뢰즈가 철학사를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모든 것을 내재성의 장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강밀도의 연속체를 다룬다.
2) <안티 오이디푸스> : ‘정신 분석학 비판을 위하여’
이 책 전반에서 사용하는 '욕망하는 생산' 이란 개념은 욕망과 생산이 하나의 동일한 힘이라는 것을 표시합니다. 이를 통화 가족화된 욕망, 오이디푸스화된 욕망에 파열구를 만들어 내고 그들 통해 ‘욕망하는 생산’의 흐름이 분출하며 흐르게 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 자체 혹은 무의식 이론을 혁명적으로 변환시킬 가능성을 시험한다. 욕망에 기초하여 혁명을 다시 정의하고 다시 사유한다. 이론적 변환은 금욕적 틀로부터 탈주하는 게 이중의 질문의 통해 이루어진다.
첫째 “대중은 어째서 마치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 하는가?” 라이히와 “왜 인민은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 ? 스피노자의 질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억압적인 욕망의 문제를 바로 ‘억압에 대한 욕망’이라고 말하면서 억압에 길든 욕망을 혁명적 욕망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둘째 “금욕에 기초하지 않은 혁명, 반대로 욕망에 기초한 혁명은 불가능한가 ?” 레닌은 “대중들은 이데올로기라는 거짓된 의식속에 빠져 있고, 혁명의 전위계급이 이들에게 노동자 계급이라는 올바른 계급의식을 일깨 워주면 이들은 혁명의 주체로서 이데올로기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이와 더불어 욕망이란 기득 권의 향락과 같은 것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사람들에게 도덕적 금욕을 요구하며 대의를 위한 행동으로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금욕적 의무나 도덕이 아니라,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욕망’에 기초할때 비로소 그 힘이 극대화 될 수 있고 진정 혁명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3)<카프카>: ‘욕망’에서 ‘배치’로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의 배치들이 다양한 양상, 그리고 권력은 금지하고 억합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차라리 생산하고 구성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명제, 주체란 그러한 권력의 효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명제가 권력과 욕망이라는 관계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에 큰 변화를 야기한다.
들뢰즈 카타리의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에서 ‘억압적인 욕망’과 ‘혁명적인 욕망’ 이분법을 포기하고, 욕망이 권력이 되고, 권력이 욕망이 되는 관계를 발견하고 카프 카의 소설을 통해 그것을 확립한다. 카프카의 『성』에서 욕망이 성의 권력이 작동하기 이전에 이미 권력자가 바라는 바에 따라 타인은 물론 자신들의 삶을 길들이고 그에 응하지 않은 아말리아의 가족을 파괴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소송』이 보여주는 것처럼 법이라는 초월적 권력은 어떤 특정한 욕망이 법화된 것 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K가 체포되는 이유는 K의 욕망이 법의 자리를 차지한 특정한 욕망과 달랐기 때문이다. 욕망은 순수하거나 고정된 본성을 가진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특정한 배치 속에서 특정한 욕망으로 존재 한다. 그 상이한 배치들간의 차이와 대립이 있으며 지배적인 위치를 갖는 경우 권력이란 개념을 부여 받게 된다. 배치가 바뀌면 그것에 지배적인 욕망 역시 바뀌게 된다. 『카프카』는 욕망과 권력이 상호 분리된 것이 아니고, 또한 권력이 초월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욕망과 권력이 내재적인 관계에 있음을 드러내고 이들의 위치가 언제나 특정한 배치 속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4) <천의 고원>: 새로운 역사 유물론
천의 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치다. 배치란 어떤 항의 의미를 그것과 연결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게 만드는 개념이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실이 그것이 다른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다시 말해 다른 것과 어떻게 게열화되는 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개념에서 들뢰즈는 사물의 의미를, 지시나 의도, 혹은 기호 작용이 아니라 이웃한 항들과의 이웃관계로 의해 정의하려고 한다. 이것이 의미를 사건으로, 생성으로 다루려는 들뢰즈의 구상이 창안해낸 독창적 의미의 논리다.
배치 안에서 각각의 항은 다른 이웃항과 접속하여 하나의 기계로 작동한다. 기계란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부분이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일반적인 기계를 가리키는 의미가 아니다. 배치 안에서 다른 것과 연결되어 계열화된 모든 항 하나하나가 기계이다. 기계란 다른 기계와 접속하여(연결되어)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 하는 모든 것을 일컫는다. 가령 입은 음식과 연결되면 먹는 기계가 되고, 소리의 흐름과 연결 되면 말하는 기계가 된다. 『천의 고원』에서 모든 것은 배치와 기계를 통해 다뤄진다. 욕망 주체를 기계라고 부른다. 이것은 욕망에서 인격성을 떼어버리려는 의도이다. 욕망이라고 하면 그것을 소유한 주체를 인간으로 보기 쉽기 때문이다. 욕망이 비인격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이라면 인간의 속어이 아니다.
배치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앞서 얘기한 물질적 기계들로 이루어진 ‘기계적 배치’이고 다른 하나는 기호와 언표 행위로 이루어진 ‘언표행위의 배치’이다. 이 둘은 하나의 동일한 배치 를 이루는 두 가지 측면이다. 더불어 배치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통해 작동한다. 배치가 바뀌면 배치를 이루는 기계들의 접속이 바뀌고 동시에 배치를 이루는 언표행위 역시 바뀌게 된다. 식당의 배치 속에서 입은 먹는 기계가 되고 식당에서의 언표 행위는 일상적인 말들로 이루어진다. 반면 식당의 배치에서 강의의 배치로 바뀌면(식당에서 탈영토화홰서 강의로 재영토화되면) 입은 말하는 기계가 되고 그에 상응하는 언표 행위는 강의와 관련된 이론과 개념으 로 이루어진다.
이 지점에서 배치는 맑스의 역사유물론과 연결된다. 맑스는 중세에서 근대 자본주의로의 이 행을 W-G-W’(상품-화폐-상품)에서 G-W-G’(화폐-상품-화폐)로 상품과 화폐의 계열화과 바뀐 것을 통해 설명한다. 맑스는 자본주의가 화폐와 상품의 특정한 계열화를 통해 구성된 특정한 배치라는 것을 드러냈다. 『천의 고원』은 맑스가 선취한 배치의 역사유물론을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하고 변형한 책이다. 『천의 고원』은 모든 것을 욕망으로 다루며 또한 욕망을 언제나 특정 한 배치 속에서 다룬다. 욕망의 다른 배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욕망의 문제로 혁명을 사유하고 실천을 이야기 한다. 욕망 및 권력배치의 배치와 그 변환을 다루는 역사이론이요. 욕망/권력의 역사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