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메모 2021. 11. 19. 12:52

사건이란 무엇인가 ? 들뢰즈 철학에서 사건은 아주 다른 두가지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하나는 삶이나 세계의 곡절과 결부된 사건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기호의 의미와 결부된 사건의 개념입니다. 들뢰즈가 명시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전자를 다시 두개의 개념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삶에서 그 이전과 이후를 결코 동일할 수 없게 만드는 변곡점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삶에서 하나의 사건이었다” 라고 하게 하는 계기가 그것입니다. 조에 부스케(Joe Bousquet)가 총상을 입은 사건, 에이 허브가 모비빅을 만난 사건 같은게 그것이죠. 들뢰즈가 직접 사용한 개념은 아니지만 실존적 사건이라고 명명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와 달리 아주 다른 두개의 세계로 분기되는 분기점으로서 사건이 다른 하나 입니다. 성경에서 아담이 사과를 딴 사건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사과를 딴 세계와 따지 않은 세계가 분리되는 분기점 이지요. 주어진 세계와 공존 가능하지 않은 새로운 세계가 거기서 시작됩니다. 물론 이 역시 두개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건 전후의 세계가 분리되는 것이란 점에서 실존적 사건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한개인의 삶이 아니라 세계가 달라지는 변곡점이라는 점에서는 그와 다릅니다. 아담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변곡점이 되니까요. 이를 편의상 ‘세계 간 사건’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세계란 ‘영혼 안으로 접혀진 주름’이라는 들뢰즈의 라이프니치식의 어법을 따라 이렇게 말해도 좋겠습니다. 실존적 사건이 하나의 영혼안에 새로운 세계가 출현하는 사건이라면, 세계간 사건은 기존의 영혼들 사이에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는 사건입니다. 기존의 영혼들과 공존하지 않은 새로운 주름들을 접어너어 새로운 영혼들이 탄생하는 사건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이 두사건 사이에는 또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세계간 사건은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건 인근에 있다면 좋든 싫든 그 효과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반면 실존적 사건은 그것의 존재를 긍정하는 가의 여부가 없었으면 좋았을 사고와 있어서 좋았던 사건을 구별해 줍니다. 들뢰즈가 인용하는 시인 조에 부스케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애초에 총상은 평생을 침대에 누워서 보낼 수 밖에 없게 한 불행한 사고 였지요. 그러나 그로 인해 그는 존재의 심층을 사유하는 탁월한 시인이 됩니다. 그 시인의 삶을 긍정할 수 있게 되자 그를 병상에 눕게 했던 그 사고는 긍정적 삶의 시점으로써 긍정하게 됩니다. 있어서 좋았던 긍정적 변곡점이 된 것입니다. 니체라면 이를 ‘과거에 대한 원한’과 대비하여 ‘과거의 구원’이라 했을 겁니다. 현행의 삶에 대한 긍정이 지나간 과거를 구원한 것입니다.

이들과 달리 특이성과 짝지어져 있는 사건의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사건 개념은 앞서와 같이 무언가를 크게 바꾸어 놓는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최소 크기의 작은 사건이고, 유래 없는 사건이 아니라 흔히 반복되는 일상적인 사건이란 점입니다. 거창하게 사용되는 사건이라는 말과 다른 결을 갖는 사건의 개념이 입니다. 이러한 사건 개념은 삶을 급습한 최대 크기의 사건인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건 개념이나 존재의 공백 에서 발생하는 바디유의 유래 없는 사건 개념과 대비해도 좋을 겁니다. 미리 말해 두자면 들뢰즈는 사건을 생성으로서 정의하려 합니다. 생성이 매 순간 어디서나 발생하는 것이라면 생성으로서의 사건 또한 흔치 않은 것 뿐 아니라 일상적인 것을 담아 내야 합니다. 아니 일상적인 것마저 유별난 것, 특이한 것을 통해 정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상적인 사건조차 특이성을 통해 정의하려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들뢰즈는 놀랍게도 이작은 사건 개념을 영원회귀의 윤리적 선택으로 밀고 갑니다.

의미의 논리에서 들뢰즈가 집중적으로 천착하는 것은 바로 이 작은 사건 개념입니다. 여기서 기호나 말의 의미란 사건이고 사건이란 특이성 즉 특이점이 되는 사실들의 계열화로 정의됩니다. 가령 날아가는 축구공을 보고 축구공이라고 한다면 맞는 말이지만 단순한 동어 반복에 불과 합니다. 역으로 축구공의 의미를 ‘저기 날아가는 저 사물’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이런게 재현적 관점에서 말하는 의미의 개념입니다. 하지만 날아가는 축구공을 아무리 집중해서 보고 그 의미를 새기고 또 새겨도 축구 경기를 보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날아 가는 공만 보고 있는 겁니다. 날아가는 공의 의미를 전혀 모른체 말입니다.

날아가는 공의 의미를 알려면 그공과 접속된 이웃항을 보아야 합니다. 공의 앞뒤에 있는 선수 말입니다. 공을 찬 사람이 한국 선수였고 그 공을 받은 사람이 한국 선수였다면, 날아 가는 공의 의미는 패스 입니다. 그러나 그 공을 받은 사람이 독일 선수 였다면 즉 한국 선수, 공, 독일 선수로 계열화 되었디면, 그 공의 의미는 패스 미스가 됩니다. 만약 공 뒤에 이어진 것이 골대 였다면 공에 의미는 슛이 될 것이고, 골대의 안쪽 이었다면 공의 의미는 골인이 될 것입니다. 그 골대 앞에 장갑을 낀 한국 선수가 있다면 맞습니다. 자살 골 입니다.

이런 것이 의미로서의 사건 입니다. 축구 경기라면 매번의 발길질 마다 사건이 발생한다 해도 좋겠습니다. 그 사건을 알아보는 것이 바로 날아다니는 공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이 의미들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공을 보는게 아니라 축구 경기를 보게 되는 것이지요 축구 경기를 하는 것도 마찬 가지 입니다. 축구를 한다 함은 그런 사건들을 연이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축구경기란 패스, 슛, 골인 등 작은 사건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또 다른 사건 입니다.

축구공이 물리적 실체라면 의미란 그것의 표면에 달라 붙는 이웃항에 따라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똑같은 물리적 실체인 공이 이웃하는 항에 따라 이렇게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사실들이 신체적인 것이라면, 사건은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건은 신체의 표면 효과라고 합니다. 즉 의미란 현상학자들의 말처럼 주체의 의도나, 지향성의 사물도 아니고, 실재론 자들의 말처럼 지칭 된 사물에 속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물의 계열화로 발생하는 표면 효과 입니다. 주관성과 실재성 사이에서 물질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사건 입니다.

사건은 특이성에 의해 정의됩니다. 패스 , 패스 미스, 슛, 골인, 자살골은 모두 다른 특이성들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이 특이성은 공과 선수, 골대 등이 계열화 되는 양상에 의해 정의됩니다. 공과 선수, 골대는 일종의 특이점에 해당됩니다. 의미란 사건이고 사건이란 특이성이다라는 말은 정확히 이런 뜻 입니다.

그런데 좀더 정확히 쓰려면 이렇게 써야 합니다. “이념적 사건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특이성이다.” 즉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이란 이념적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이념적 사건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이 개념이야 말로 들뢰즈 사건 개념의 내부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여기서 사건에 추가된 이념이란 개념은 차아와 반복에서 제시된 이념의 개념입니다. 이 이념의 개념은 이미 서술한 바있듯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통상적인 거대한 이념 개념과 반대로 물음과 문제로서의 이념, 최소 크기의 미분적인 이념, 잠재성을 으로서의 이념입니다. 이 때 잠재성은 미 규정성, 규정 가능성, 완결된 규정을 가지며 외부적 조건과 결합하며 현행화 됩니다.

의미의 논리에서는 이러한 이념 개념을 사건 개념과 결합하여 이념적 사건 개념을 발전 시킵니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이념 개념이 이전 철학에서는 일반성이나 보편성이 수행하던 통일성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 입니다. 다시 축구 이야기로 돌아 갑시다. 패스나, 패스 미스 등의 사건이 특이성으로 정의되는 방식은 이웃 관계를 뜻하는 미분적 관계에 의해서 였지요. 그런데 이렇게 정의되는 패스나 패스 미스는 단지 특정 상황에서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라 축구 경기이면 어디서나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물론 상황마다 다르게 현행화 되겠지만 일종의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마다 다른 축구 경기를 만들어 가는 미시적 씨앗입니다. 축구 경기의 원자 들이지요. 그런 점에서 특이성이란 물리적으로 구체화된 특정 시합과 다른 층위에 속합니다. 현생성이 아니라 잠재성에 속하지요. 패스, 패스 미스, 슛, 골인 등 공을 둘러싼 특이성들은 축구경기를 구성하는 최저 크기의 의미 단위입니다. 언어학의 음운론에서 음소, 의미론에서 형태소와 비교되는 의미의 최소 분절 단위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완결된 규정을 갖는 최소 의미 단위이지요. 이러한 의미 단위가 결합되어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좀 더 큰 스케일의 사건이 만들어 집니다. 축구 경기를 한다 함은 이 작은 사건들을 어떻게 집중할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공을 차려고 할때마다 혹은 전술이나 전략을 세울때마다 특이적 사건들을 문제화 하는 겁니다.

“사건의 양상은 문제이다” 가령 한 번의 공격은 어떻게 패스를 연결하여, 골인으로 이어지는 슈팅을 할것인가 하는 대한 문제를 묻고 그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한번의 경기는 이런 공격과 수비를 어떻게 편성 할 것인가 ? 하는 문제를 던지고 그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를 풀기 위해선 상대편과 자신의 전력을 분석해야 하고, 그 날의 구체적인 조건을 고려하여 답을 구해야 합니다. 물론 최소 크기의 수준에서도 사건은 문제 입니다. 패스를 한다는 것은 어디로, 어떻게 패스 할 것인가를 스스로 묻고 답하는 것이니까요

이 최소 크기의 사건이 바로 이념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패스나 슛은 미시적 사건이지만 사실 최소 크기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물론 이어진 다른 패스나 슛 같은 다른 사건들과 아직 결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 규정적이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완결된 규정을 갖습니다. 패스는 슛이 아니고 패스미스도 아니까요. 하지만 최소 크기의 사건으로 순수 잠재성 쪽으로 좀더 거슬러 올라 가자면 발 앞에 공으로 패스를 할 것인지, 슛을 할 것인지를 아직 결정하지 않은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즉 패스 인지, 슛 인지 규정되지 않은 미 규정성으로 이웃한 어떤 발들과도 계열화 되지 않은 공으로 거슬러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것은 공이라는 사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공이 아니라 공과 이웃항에 관계 짓는 사건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패스나 슛은 물론 경기장 밖으로 차거나 심판의 얼굴을 향해 차는 등 공의 표면에 가할 어떤 힘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사건들을 만들어 내는 사건 화의 힘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는 힘의 크기와 방향에 따라 달라 질 수많은 규정 가능성으로 그토록 수많은 사건들에 열린 미규정적 사건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모든 사건들의 배아라고 해도 좋을 사건, 순수 잠재성으로서의 사건 입니다. 어떤 사물도 포함하지 않는 공과 이웃한 항 사이에 빈공간이 거기 있습니다. 이처럼 아직 어떤 규정성도 갖지 않은 그러나 모든 사건, 모든 이웃항을 향해 열린 이 순수 잠재성을 들뢰즈는 하나의 단일한 사건이라고 명명합니다. 모든 사건들을 소통시키는 하나의 단일한 사건이라고, 들뢰즈가 일부러 대문자로 표기하는 이 순수 사건은 어떤 사물도 포함하지 않는 사건입니다.

모든 이웃항 사이에 있는 잠재적인 사건 입니다. 미 분소 만큼 작은 최소 크기의 사건이지요. 모든 규정성을 향해 열어둔 미 규정성의 빈칸이 모든 의미의 사건으로 열린 무의미가 거기 있습니다. 이는 두 사물뿐아니라 사물의 두상태 사이의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더 큰상태와 더 작은 상태 사이에서 발생하는 커지다 같은 사건이 그것입니다. 의미의 논리의 첫 부분에서 말하는 순수 생성이란 두 상태 사이에서 발생하는 최소 크기의 순수 사건을 뜻합니다.

이 사건은 모든 크기와 방향의 힘을 표시하도록 해 주지만 자신은 어떤 규정성도 갖지 않는 미분 이론의 미분속 dx와 닮았습니다. 공에 가해질 힘의 크기와 방향공의 착지점의 이동속도 등과 서로 미분적으로 관계 지어질때 이 미분소적 사건은 구체적인 상호 규정속으로 들어 갑니다. 그 규정은 이 상황을 골로 연결하려면 어디로 어떻게 차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던져 집니다. 그리고 공의 무게와 바람, 공의 경로에 끼어들 상대 선수의 위치와 속도 등 구체적인 조건이 고려되면 패스는 물리적으로 현행화 되게 됩니다. 현행적 현실로 유효화 된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공을 찬 순간 공은 아직 가 닿지 않은 착지점을 이미 그 표면으로 당기고 있습니다. 이미 물리적인 사건이 된 것 입니디다.

공을 찰때 마다 선수는 ‘어떤 사건’ 이라는 문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하나의 물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공을 찰 것인가 ?’ 이는 각 선수들이 공을 차려 할때마다 던져야할 하나의 동일한 물음 입니다. 물론 이물음은 따로 던져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공을 둘러싼 선수들의 분포, 골대의 위치, 이동할 수 있는 빈공간 등의 조건 속에서 던져지기에 언제나 문제로서 던져 집니다. 그래도 패스, 슛등의 이념적 사건 이전에 미규정의 최소 사건이 있듯이 구체적 조건 속에서 던지는 문제 이전에 항상 던져야 할 하나의 동일한 물음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이 물음이 던져 질때 아직 차지 않은 공은 수많은 사건들의 가능성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어떻게 찰 것인가 ? 하는 물음은 어떠한 사건을 향해 찰것 인가 하는 물음 이기도 합니다. 발길질에 의해 공과 이어질 수많은 착지 점들의 집합을 들뢰즈는 우발점이라고 명명합니다. 수많은 규정가능한 사건들 전체가 우발점이란 집합의 원소인 것입니다. 우발점의 원소들에 둘러싸인 하나의 단일한 사건은 그 모든 사건들의 잠재적인 배아 입니다.

현행화된 사건은 확정된 규정을 가질 뿐만 아니라 대개는 성공과 실패, 좋다와 나쁘다 등의 평가 마저 갖습니다. 어렵게 이어진 패스는 박수를 받고, 골로 이어진 멋진 슛은 갈채를 받지만 미숙한 패스 미스느 야유를 받고 파올은 비난을 받습니다. 그래도 축구는 게속되고 그래도 새로운 사건을 향한 발길질은 계속됩니다. 멋진 패스를 실패로 끝내 안타까운 슛이었지만 ‘다시한번’ 하며 골을 향해 달려 갑니다. 우발점 속에서는 우리 의식이 포착할 수 없는 최소 시간이 포함되어 있기에 문제를 풀기 위해 선수가 찬 공은 뜻하지 않은 가능성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렇기에 탁월한 선수는 실패의 가능성이 크다 해도 확률을 가로 질러 사건의 새로운 반복을 향해 달려 갑니다. 공 주위를 둘러싼 우발점을 향해 순수 잠재성으로 사건을 향해 주사위를 던지는 겁니다.

축구 뿐이겠습니까. 사랑도 그렇고 혁명도 그렇습니다. 성공할 확률에 개의치 않고 새로운 사건화의 우발성을 향해 주사위를 던지는 것, 그것이 영원회귀의 주사위 놀이 입니다.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 사건을 들뢰즈가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이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