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_가타리/개념어(DTG)

5. 잠재성과 현행성

행복메모 2021. 11. 15. 13:50

 

통상적 어법에서와 유사하게 들뢰즈가 말하는 잠재성이란 아직 현행화되지 않은 능력입니다. 가령 반고흐는 30대 중반에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전에는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반 고흐 뿐일까요 어떤 사람도 그림이든 음악이든 본격 시작하기 전에는 그런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지요. 시작하고 보면 이런 능력이 있었네 하지만 사실 그 전에도 그걸 잘 할 잠재적 능력이 있었음은 분명하지요. 본격 시작해서 펼쳐주는 것을 현행화라고 합니다. 현행성은 잠재성과 짝이 되는 개념이지요. 잠재성을 능력이라고 했지만 좋은 의미로 사용하는 능력만 그런건 아닙니다.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는 선량한 신사인 지킬의 신체 안에 난폭하고 악마적인 인물 하이드가 숨어있다는 상상을 통해 쓰여졌지요. 이 역시 알지 못하던 어떤 잠재성을 인물로 형상화한 겁니다.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전사 같은 모습으로 바뀌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현행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잠재성은 현실적으로 존재합니다. 다만 있는 줄 모를 뿐이지요. 역으로 현행의 활동은 잠재성에 기입되고 그것을 변화시킵니다. 붓을 쓰고 펜을 쓰는 활동은 손이나 신체 감각과 관련된 새로운 능력을 형성합니다. 잠재성이란 그저 타고난 것만은 아니란 말입니다.

잠재성이란 지금 현행화 되지 않았지만 어떤 조건이 갖춰지면 현행화될 어떤 자질이나 능력입니다. 들뢰즈는 잠재성이 가능성과 달리 현실의 일부임을 강조합니다. 잠재성은 눈에 안보여도 있는 능력이지만 가능성은 눈에 보인다 싶을 때에도 상상이나 표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능성이란 단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는 모든 것입니다. 가령 가수 톰 웨이츠가 화가가 될거라는 말과 대통령이 될거라는 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다릅니다. 그는 지금 화가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닙니다. 어떤 자질을 직접 확인한 바는 없지만 소리에 아주 민감한 감각을 가진 아티스트일 테니 그런 감각을 색과 형태로 표현하려고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유명한 화가로 성공할 지는 잘 모릅니다. 이는 단지 가능성일 뿐인 거죠. 물론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민주주의 제도 아래에서 누구에게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러나 실제로 톰 웨이츠가 대통령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것 같습니다. 듣기 좋은 뻥을 잘치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없는 약속을 할 줄도 모르며,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가질 얼굴과는 거리가 좀 멀죠 그러니 대통령이 되려면 통상은 일어나기 힘든 어떤 특별한 일이나 변수를 끼워 넣어야 합니다. 가령 미국을 지배하려는 KGB의 음모라던가 톰 웨츠의 목소리에 반한 외계인의 개입이라던가 아니면 미국인들이 노래 하나에 미치는 기적 같은 사건 같은거 말이죠. 이경우에도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그의 잠재적 능력에 속한 것이 아니라 새로 끼워넣는 그 특별한 일에 기인한 겁니다.

현실성과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현실성안에 잠재성과 현행성이 있습니다. 안보이는 뜻밖의 잠재성 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달걀은 닭의 신체와 결코 같지 않지만 닭으로 현행화될 잠재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배아는 성체와는 다르지만 성체를 잠재성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경우 잠재성은 뜻밖의 능력이나 자질이 아니라 충분히 현행화 되리라 예상되는 능력이나 자질을 뜻합니다. 달걀에서 닭 말고 나올 수 없으니 벗어날 수 없는 필연성 조차 갖는다고 해야 겠지요 . 잠재성에서 중요한 것은 뜻밖의 것이 아니냐, 예상 가능한 것이 아니냐가 아니라 지금 현행화 되지 않았지만 조건이 갖추어지면 현행화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잠재성 개념은 한 두 방향으로 열려있는 미래를 갖는다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펼쳐지는 미래이고 다른 하나는 예상할 수 있고 심지어 벗어날 수 없는 미래 입니다. 달걀에겐 요리나 모욕의 도구가 될 미래와 닭이 될 미래가 모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이것이 잠재성이란 말을 철학적으로 개념화하려고 할때 어렵지만 매력적인 지점이기도 합니다.

예상 밖의 미래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필연적으로 펼쳐질 잠재성과 그렇지 않은 잠재성을 구분하지요. 가령 달걀은 어미가 품으면 좋든 싫든 닭이 될 수 밖에 없는데, 건축가는 싫으면 집을 짓지 않을 수 있죠. 그는 후자를 인간적 잠재성이라고 합니다. 철학자 아감벤은 바로 이말을 받아서 진정한 잠재성이란 하지 않을 능력이라고 까지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이지요. 잘 생각해 보면 인간의 배아도 모태에 자리 잡으면 자기 뜻과 상관없이 인간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으니 인간적 잠재성과 거리가 멉니다. 또 원숭이나 쥐도 짝짓기를 거부하고 사육장이나 실험실을 벗어나려 한다는 하지 않을 능력이 있음이 분명 합니다. 잠재성의 아주 다른 두 미래를 다루기 위해서 들뢰즈는 잠재성이 미규정성과 규정성에 모두 존재함을 강조합니다. 예컨대 유전자를 이루는 핵산들은 구성 성분이나 결합형태에 따라 아데닌 구아닌 티민 사이토신 등의 명확한 규정성을 같습니다. 나아가 아데닌은 티민과 구아닌은 사이토신과만 결합한다는 점에서 작동 방식도 명확히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유전 메카니즘에 근간을 이루는 것이죠. 그런데 핵산 자체만으로는 어떤 유전 형질도 같지 않습니다. 규정성과 동시에 미규정성을 갖고 있는 거죠. 각각의 핵산은 다른 핵산 들과 어떤 이웃관계를 갖는가에 따라 다른 유전자가 됩니다. 이웃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규정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겁니다. 미규정성이란 규정 가능성이 너무 많아서 하나의 규정성을 같지 않음을 뜻합니다. 규정성에 따른 미래를 갖지만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미래에 열려 있는 겁니다. 이는 유전자도 유기체도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신체의 인간이 이웃관계에 따라 다정한 아버지에서, 고문 경관으로, 계산 빠른 투자가로 달라 집니다. 핵산들의 이웃관계가 유전자를 규정하고 유전자들의 성체의 종적 특성을 규정합니다.

들뢰즈는 이런 이웃관계를 미분적 관계라고 하지요. 핵산이나 유전자가 이처럼 이웃 관계를 가지며 배열되는 것을 들뢰즈는 미분화라고 명명합니다. 다른 한편 미분적 잠재성이 펼쳐지는 것을 분화라고 하지요. 미분화가 분화 될때 개체 잠재성을 표현한다면, 분화는 미분화된된 것이 펼쳐져 현행화 되는 겁니다. 미분적 잠재성과 분화된 현행성은 그 자체만으로 서로 대칭적 입니다. 미분과 적분이 서로 대칭적인것에 따릅니다. 유전자를 보면 유전 형질을 예측할 수 있고 유전 현질을 보면 관련 유전자가 있으리라고 추측할 수있지요. 이 말은 미분적 잠재성이 분화되는 것만 보면 현행성은 접혀 있던 잠재성이 펼쳐지는 결정성의 숙명을 면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실제 현행화 되는 과정은 이처럼 접힌 것이 펼쳐지는 분화 과정을 초과 합니다.

유전자가 단백질을 형성하는 양상은 세포등의 조건에따라 달라지고 ,배아가 자라고 발생하는 양상 또한 양수나 영양상태등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원이라는 도룡뇽의 배아 표면에 특별한 자극을 가하면 머리가 둘달린 영원이 태어나기도 합니다. 또 배아가 모태에서 겪는 기아는 영양분의 흡수를 극대화하는 대개는 꺼져 있던 유전자를 가동시켜서 비만 신체를 만들기도 하지요. 환경이나 조건이 발생 과정에서 개체의 신체 안에 접혀 들어가는 겁니다. 이로 인해 쌍둥이 처럼 같은 유전자를 가진 배아들도 다른 개체의 길을 가게 됩니다. 괴물 같은 개체들이 탄생하기도 하구요. 뜻밖의 미래가 바로 거기서 도래 합니다. 개체의 발생 과정은 한편으론 유전자에 의해 규정된 잠재성에 분화 과정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전자에 없는 미래가 도래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점에서 현행화는 모두 개체화인데 개체화는 언제나 분화를 초과합니다. 이를 들뢰즈는 초험적 원리라고 하는데요 미분화와 분화가 대칭적이라면, 미분화와 개체화는 비 대칭적 입니다. 도룡뇽의 유전자로는 두개의 머리를 예측할 수 없고 그 두개의 머리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유전자를 추측할 수 없기 때문이죠. 외부 조건이 강도적인 차이가 분화 과정에 끼워들기 때문입니다. 외부 조건에 따른 강도적인 종합이 잠재성과 현행성 사이에 비대칭성을 끌어 들이는 겁니다. 어떤 외부와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글들을 보면 분화와 개체화를 동일시 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데요 그런데 실제로 들뢰즈는 미분화 된것이 펼쳐지는 분화와 강도적 종합에 의해 외부 조건이 접혀 지며 펼쳐지는 개체화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분화와 개체화라는 두가지 다른 현행화의 길이 있는 겁니다.

잠재성과 가능성이 구별되어야 하듯이 분화와 개체화도 구별 되어야 합니다. 분화와 개체화는 완결된 규정을 갖는 잠재성이 펼쳐질때에도 두가지 다른 양상으로 펼쳐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적 잠재성은 하지 않을 능력이라고 자랑하지만 펼쳐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대비는 사소한 차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펼쳐질 숙명을 피하는 길이 펼쳐 지길 거부하는 부정의 행위일 뿐이라면 그것은 선 결정된 숙명이라는 신의 심판을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접힌채 그 심판에 갇혀 있는 거지요. 오히려 중요한 분기점은 접힌 것이 그대로 펼쳐지는 것과 뜻밖의 양상으로 펼쳐지는 것이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가령 양철북의 오스카는 성장을 거부하지만 그것뿐이라면 거기서 끝나고 말았을 겁니다. 성장하지 않는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 이야기 말고 거기서 무슨 얘기가 나올 수 있을 까요. 거기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성인이 되는 것을 중단함으로써 기성의 성인과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된다는 게 있습니다. 그걸 알게 되면 성장을 중단한다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스카는 다시 성장하겠다고 하지요 하지만 잠재성 개념이 갖는 힘, 숙명에 반하는 다른 미래는 현행화가 아니라 반대로 잠재와의 길을 따라 갈때 좀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잠재화한다는 것은 신체를 생물학적으로 되돌려 수정란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신체를 다른 외부와 결합하거나 변형시켜 다른 신체를 만드는 현실적 생산입니다. 이미 발로 분화된 신체를 수정란으로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죠 하지만 발이 접속하는 외부를 땅에서 나뭇가지로 바꾸거나 돌맹이로 바꾸게 되면 발이 아닌 다른 것이 됩니다. 신체를 받치고 대지를 달리라는 신의 심판에서 벗어나서 나무를 타거나 도구를 사용하는 기계가 되는 거죠. 쿵후라 함은 무인의 손은 강도를 바꿔 칼이나 몽둥이로 변형시키지요. 이는 발이나 손이 갖고 있는 비 현행적인 잠재성 때문에 가능합니다. 지금의 현행성에서 잠재성을 거슬러 올라가 다른 현행성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톰 웨이츠가 목대신 손으로 마이크 대신 캔버스에 소리를 담으려 한다면 그는 잠재와의 선을 따라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 잠재화의 극 단에 있는 것이 바로 기관 없는 신체 입니다. 기관들의 분화되기 이전의 신체를 뜻하죠 유기체의 기관이라는 정해진 숙명에서 벗어나 다른 기계로 신체를 변형한다는 것은 모두 기관없는 신체라 명명된 최대 잠재성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 표면에 다른 힘과 욕망을 등록해서 다른 신체로 현행화 하는 거죠

 

 

잠재성과 현행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