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메모 2021. 11. 13. 09:02

초험적 경험이란 무엇인가?  초험적 경험이란 경험을 넘어선 경험 입니다. 쉽게 말하면 통상적 경험을 넘어선 경험입니다. 어렵게 말하면 불가능성의 경험입니다.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게 강요하는 것인데 이는 이게 뭐지, 곤혼스러움을 야기 할뿐 그게 뭔지 도저히 사유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사유 불가능성의 경험을 야기합니다. 뭔가 보거나 들었는데 뭔지 알 수 없는 것으로 감각 불가능성의 경험을 야기합니다. 요컨데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사태와 만나는 경험, 감각 밖에 될 수 없는 감각 불가능한 것과 만나는 경험 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1910년대초 화가 칸덴스키의 경험이 그런 경우 입니다. 어딘가 외출했다가 자기 아들리에로 되돌아 왔다는데 아주 낯선 그림이 있더랍니다. 자기 아들리에니 자기 그림 밖에 없을 터인데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는 겁니다. 더욱 당혹스러웠던 것은 그게 대체 무엇을 그린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해요. 그러나 분방한 형태와 색채가 아주 아름다웠기에 홀린 듯 그 그림을 한참 보았다지요. 나중에 보니 자신이 그린 그림인데 어쩌다 옆으로 돌려 놓은 거 였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구체적 형상을 제거해도 아름다운 그림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후 구상을 떠나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추상화가 탄생한 겁니다. 바로 이런 것이 초험적 경험 입니다. 분명히 눈에 보이기는 하는데 그게 먼지 전혀 알 수 없는 경험, 감각만 될 수 있을 뿐 뭔지 감각 불가능한 것의 경험 입니다.  이 경험으로 인해 칸덴스키는 그림에 대한 발상이나 감각을 바꾸게 되었고, 덕분에 추상화 창시자 중 한사람이 됩니다. 그림이 뭔지 쉽게 알아 봤으면 그림을 바로 세우는 것으로 끝났을 텐데. 알아보지 못했기에 그림에 대한 발상과 감각을 바꾸게 된 겁니다. 추상화의 창시자라는 역사적 인물이 된 거죠. 초험적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죠

칸덴스키가 감각과 결부된 초험적 경험의 사례를 보여준다면 중국의 선사들은 사유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경우를 잘 보여 줍니다. 가령 어느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찾아와 불도를 물었답니다. 부처란 대체 무엇 입니까 ? “뒷간 똥 막대기다” 물었던 스님의 표정이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 헉 이게 무슨 소리야. 부처가 뒷 간 똥 막대기라니 다른 선승도 그렇습니다. 달마 대사가 멀리 중국에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무엇을 가르치러 온것이냐고 묻는 물음에 조주스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 이말을 듣고 그냥 웃어넘기면 아주 흔한 통상적 경험이 됩니다. 농담이나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듣는 흔한 경험이 되고 맙니다. 물음에 절심함이 없을때 이렇게 되죠. 물음이 절실 했다면, 이런 답을 듣고 먼소리야 하고 그냥 웃어 넘길 수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고승이 물은 사람에게 불도의 요체를 한마디로 깨우쳐 주려고 한 대답이니까요. 그러나 불도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이론이나 사유를 다 동원해도 답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사유해야 하는데 사유할 수 없는 사태를 만나게 되는 거죠. 그러니 사실 대답은 불도에 대해 물었던 사람이 갖고 있던 모든 답을 와해 시키는 대답이고 그 대신 하나의 커다란 의문을 주는 대답입니다.

절실함이란 강도입니다. 물음이 절실했다면 대체 왜 저리 말했을까 ? 하는 의문이 더 없는 강도로 밀려 들어 왔을 겁니다 . 그래서 초험적 경험에서 강도가 중요합니다. 들뢰즈가 사유를 강제하는 폭력이라는 말까지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선사들은 사유를 강제 하기 위해 말 그대로 폭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몽둥이질을 하기도 합니다. 강도가 없으면 사유 불가능한 것을 그냥 무의미한 말이야 하고 쉽게 흘려 보내지요. 반면 강도적 절심함이 있었다면 사유 불가능한 어떤 것이 사유 속으로 강하게 밀고 들어 올 겁니다. 의문을 낳게 됩니다. 이게 뭐지 왜 그랬을까 ? 부처가 대체 뭐라는 거야. 그 의문과 더불어 비로서 사유가 시작됩니다. 선사들은 그 의문에 자신을 맡기라고 가르칩니다. 의문만 남기고 자신은 사라질때까지...

들뢰즈가 물음이나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때문입니다. 답들이 전부 무력화 되었을때 사유는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미 답을 갖고 있으면 사유할 필요가 없죠. 있는 답들을 돌려 원하는 답을 찾아 내면 됩니다. 상식에 따라 사유할 때 우리는 사유하지 않습니다. 상식이 사유할 뿐이죠. 사유해야 하지만 사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사유하기 시작합니다. 불가능성에 행사하는 폭력이 바로 초험적 경험의 요체입니다. 사유 능력을 정지 시키는 폭력적 침입이야 말로 우리로 하여금 진정 사유하게 하는 힘입니다. 초험적 경험은 차이의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아는 것, 익숙한 것 안에서 따라 이루어 집니다. 이상하다 싶은 차이를 지워 익숙한 것 안에 통념이나 상식을 제공하는 동일성 안에서 감각하고 생각합니다. 낯선 것은 별거 아닌 것 , 오차나 오류 농담이나 헛 소리로 간주하여 흘러 보냅니다. 초험적 경험이란 그 낯 섦이 지울 수 없이 강력해서 익숙한 감각이나 생각을 와해 시키는 경험입니다.

감각과 사유의 무능력 지대로 떠밀고 들어가는 강도적 경험 입니다. 감각 능력과 사유 능력의 불일치가 드러나며 적어도 둘중 하나를 바꾸게 하는 경험 입니다. 이런 경험을 숭고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이나 거대한 산이나 폭포 등 경험대상이 통상의 경험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서 제대로 표상할 수 없는 경우 발생하는 것이 숭고지요. 확실히 이런 경험도 초험적 경험에 속합니다. 그러나 초험적 경험에는 이런 경험 만 있는게 아닙니다. 앞서 칸덴스키의 경험은 숭고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운문이나 조주의 대답은 숭고 하긴 커녕 숭고한 것을 박살냅니다. 부처나 불법 처럼 숭고하다고 믿던 것을 똥통에 빠뜨려 버립니다. 숭고라는 개념에 더 나쁜 것은 초험성을 초월성으로 오인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숭고는 초험적 경험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위대하고 거대한 것으로 인도 합니다. 초월자에게 우리를 맡기도록 유도합니다. 특이한 경험을 했다며 신에게 귀의하는 경우를 보신적이 있지요. 그런데 초월자는 신이든 자연이든 사실 대단히 익숙한 관여 입니다. 이해할 없는 것을 모두 그에게 귀속 시켜 이해 했다고 설명되었다고 믿게 해주는 관여 입니다.

익숙한 감각이나 사회에서 벗어난 최소한 경험을 나의 감각과 사유를 크게 바꿔 버릴 좋은 기회를 익숙한 관여 안에 다시 귀속 시키는 겁니다. 초월자는 그렇게 초험적 경험을 망쳐 놓습니다. 숭고 또한 초험적 경험을 망쳐 놓습니다. 초험적 경험을 위해선 임재 선사의 말을 기억하는게 좋습니다.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여라” 초험성에 대한 또하나의 오해는 선험성과 동일 시 하는 것입니다. 선험적이라는 것은 경험에 앞서 경험이 가능하려면 선행 되어야 하는 조건이며,  칸트의 개념입니다. 지금 저기 있는 동물이 고양이 임을 알려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이 있어야 합니다 . 지금 저기라는 시공간적 조건을 바꿔 어제 거기로 바꾸면 고양이를 보았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지요. 고양이를 만난다는 경험은 언제 어디서라는 특정한 시공간적 조건속에서만 가능합니다. 더불어 동물, 식물 고양이 개같은 개념들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경험이 가능하려면 모든 경험에 앞서 존재하는 조건이 선험적 인 것입니다. 이는 따로 경험되지 않고 경험에 좌우되지 않기에 경험을 넘어서고 있다라고 초험적이라고 합니다. 시간이나 공간을 따로 경험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칸트에게 초험적인 것은 경에 앞서 존재하는 경험의 가능 조건을 뜻하고 선험적인 것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경험에 좌우되지 않고 누구든 경험이 가능하려면 있어야 하기에 모두에게 동일한 형식입니다. 모든 이들의 경험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형식이지요. 여기서 칸트는 진리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습니다.

들뢰즈 역시 경험이 가능하려면 이런 선험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초험적인 것에 대한 발견을 칸트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들뢰즈에게 초험적인 경험은 이런 선험적 조건 안에서의 경험이 아니라 그것을 와해 시켜 더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경험입니다. 사유와 감각의 가능 조건이 아니라 가능 조건을 깨고 뭔지 알 수 없는 어둠을 경험 속으로 불러 들이는 것입니다. 사유 능력이 아니라 사유의 무능력과 연결된 개념 입니다. 그렇기에 사실 들뢰즈의 초험성은 칸트의 초험성과 상반된다고 해야 오히려 적절합니다. 초월성과 선험성, 이는 들뢰즈가 말하는 초험적 경험을 망치는 두개의 적입니다. 비슷해 보이기에 더 치명적입니다. 숭고와 초월성의 사유에서 중요한 것이 거대한 외연적 크기라면 초험성의 사유에서 중요한 것은 강도 입니다. 감각과 사유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강도, 초월자 마저 깨부스는 강도,  선험성에서 중요한 것이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능력이라면 초험성에 중요한 것은 경험의 불가능성 이 어둠속에 밀어 넣는 무능력 입니다. 어둠의 대지속으로 흩어져 다른 감각과 사유의 거름이 되어 지는 익숙한 것,  알던 것, 판단하게 해주던 것들이 와해 될 때 지금 만난 것에 대한 진정한 경험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유와 감각의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초험적 경험주의야 말로 진정한 경험주의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칸트의 선험적이  모든 경험을 지배하는 원리라면 들뢰즈의 초험성은 경험 이전에 모든 원리를 깨부스기에,  경험에게 모든 것을 지배할 권리는 주는 원리 입니다. 경험을 동일화 하는 형식이나 원리를 제거해서 경험속에서 차이가 그 힘을 행사하게 해주는 경험, 그것이 초험적 경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