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_가타리/개념어(DTG)

27. 미시 정치학과 선분성

행복메모 2022. 8. 15. 18:26

미시 권력이나 미시 정치학 이라는 말은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사용한 이래 널리 사용되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 또한 미시 정치학 이란 말을 자신들의 문제 설정을 요약하는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특히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안티오이디푸스에게 진 빚을 명시한 바 있고, 안티 오이디푸스 영역판의 서문을 써 주기도 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카프카는 푸코의 영향이 크게 드러나는 책입니다.  천의 고원에서 미시 정치학과 선분성을 다루는 부분은 이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이는 기존 정치학의 권력 개념을 근본에서 뒤흔들며 새로운 정치분석의 장을 열었습니다. 동시에 이는 들뢰즈 가타리와 푸코의 차이가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이 명제가 보여주듯 푸코는 권력과 저항이라는 개념을 근간으로 사유합니다. 반면 들뢰즈 가타리는 욕망과 권력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합니다. 푸코는 욕망이란 개념이 결여나 억압과 뗄수 없다고 거부하지만 들뢰즈 가타리는 배치란  권력의 배치가 아니라 욕망의 배치이고 권력이란 배치가 지층화된 차원이라며, 자신의 입장을 그와 대비합니다. 푸코는 욕망보다는 쾌락이 더 낫다며 후일 성의 역사2에  쾌락의 활용 이란 부제를 붙이지만 들뢰즈 가타리는 쾌락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시키는 방종이자 재영토화라며 비판 합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미시 정치학이욕망이란 개념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로써 분명해집니다

들뢰즈 가타리에에게 욕망이란 니체의 말로 바꾸면 '의지'  더 정확히는 '힘에의 의지'입니다. 니체는 우리의 의지가 단일 하지 않으며 항상 이미 복수적임을 강조합니다. 음식을 하나 먹으려 할 때도 허기를 채우려는 욕망과 맛에  끌리는 욕망, 늘어나는 살을 저지하려는 욕망이 동시에 공존하며 맛에 대한 욕망 또한 여러 가지 다른 맛을 향하여 분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들뢰즈 가타리 는 의지 즉 욕망은 그 자체로 다양체라고 합니다.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향해 있기에 분열자 라고 명명합니다. 마치 평평한 면 위에 물처럼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는 흐름 그것이 욕망입니다.  

약간 통상적인 어법 이지만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는 흐름을 통제하여 질서를 부여하고 할 때 권력이 출연합니다. 권력이란 욕망의 흐름을 분절하고 지칭화하여 통제 가능한 질서를 부여하는 성분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욕망이란 권력의 통제 이전의 흐름,  권력의 통제를 벗어난 흐름입니다.  만약 욕망이 혁명적이라고 한다면 이는 욕망이 혁명을 욕망 한다는 말이 아니라 권력의 통제 이전에 그 통제와 무관하게 모든 방향으로 열린 흐름 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욕망과 권력은 그저 대립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특정한 형태로 지층화 되고 고체적 안정성에 갇힌 욕망이 바로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맛에 대한 욕망은 애초에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지만 자신이 속한 음식 문화의 코드에 따라 지층화 됩니다. 지층화 된 맛으 세계 안에서 익숙한 음식과 좋아하는 맛 안에서 벗어날 줄 모르게 된다면 맛에 대한 욕망은 권력이 됩니다. 내 신체를 내 취향을 선 규정하여 정해진 틀 안에서만 먹게 하는 권력이 되죠.  외국 여행을 가서도 항상 먹던 음식만 찾는 것은 선호와 욕망의 형태로 작동하는 이 권력의 작용입니다. 물론 푸코의 지적처럼 이는 그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지층화된 맛 안에서 미각을 지배하는 권력은 좀 더 나은 맛, 좀 더 맛있는 음식을 생산하게 하니까요.  공부하도록 훈육된 신체가 학습 능력이나 집중력을 생산 하듯이 그러나 그 때 조차 지금의 감각 지금 만든 음식에서 벗어나 좀 더 나은 것을 만들려는 욕망이 없으면 불모적인 반복에 갇히고 맙니다. 

욕망은 지층화되어 권력이 되지만 그 권력에서 다시 누수하고 그것을 범람하는 것 또한 욕망입니다. 늘 만들던 음식의 다른 무언가를 섞어 새로운 방식으로 조리해 보려는 욕망 낯설지만 뭔가 끌리는 새로운 맛에 대한 호기심이 익숙한 맛에 길든 혀의 틈새로 파고들지요. 그것은 다시 지층화 되며 권력이 되겠지만 욕망은 그 안에서 다시 탈 주 선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혁명과 보수라는 본성을 가진 욕망과 권력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이처럼 탈영토화와 와 재영토화가 반복되는 내재성의 장이 있을 뿐입니다. 혁명과 권력도 그렇습니다.  혁명은 의무감이 아니라 하고 싶다는 욕망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욕망은 혁명적인 때조차 혁명만 욕망 하진 않습니다. 혁명이 성공하면 혁명을 생산한 욕망은 자신이 생산한 체제 안에서 지층화 됩니다. 혁명의 욕망이 그 혁명을 만든 체제를 유지하려는 권력이 되는 건 차라리 자연스럽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혁명 이후 혁명은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혁명과 권력 역시 영구 혁명을 함축하는 내재성의 장안에 있는 겁니다. 

욕망의 흐름을 통제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홈을 파서 욕망의 흐름을 통제하고 이용하는 겁니다. 수로를 파서 물에 흐름을 고체적 틀에 따라 흐르게 하여 그것을 경작에 이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열린 공간이 매끄러운 공간이라면 이처럼 특정한 홈을 따라 흐르도록 하는 공간을 홈 페인 공간이라고 합니다. 가령 경찰은 이동하려는 욕망에 따라 흘러가는 교통의 흐름을 홈페인 도로 따라 흘러 가게 하고 신뢰하는 대중의 흐름은 폴리스라인 안에 가두려고 하지요.

또 하나의 방법은 선분화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의 흐름을 선으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 선이란 곡선 입니다. 직선이란 곡선의 아주 제한된 경우 일 뿐이지요. 선분이란 끝점으로 절단 된 선을 말합니다. 선분화는 욕망의 흐름을 그와 상응하는 활동의 흐름, 행동의 흐름, 사고의 흐름 그리고 대중의 흐름을 뚜렷하게 구별되는 경계에 의해 절단 하는 작용입니다. 일하는 건지 쉬는 건지,  사랑인지 우정 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확실히 하라는 말이 바로 선분적으로 절단하는 권력의 명령어입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는 이항적 선분만 있는건 아닙니다.  분업은 노동의 흐름을  절단해  선분화하는 방법입니다. 학교의 시간표는 하루의 시간을 일련의 선분들로 분할하여 학생들의 활동을  통제합니다.  이처럼 어떤 흐름을 순차적인 선분들로 절단한 것은 선형적 성분이라고 합니다. 방사상의 선을 따라 절단되는 원형적 선분도 있습니다. 나,  내가 속한 지역,  도시,  국가,  세계, 우주로 확대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선분이란 개념에서 중요한 건 양끝의  경계를 뚜렷하게 절단 하는 것입니다.이를 선분 성이라고 합니다.  권력은 그렇게 구별하고 확인하며 절단 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분업화 된 라인에서 내 작업을 제대로 완수하라고 요구하는 작업 반장이나 바로 옆에 동료를 통해 선분적 권력은 작동합니다. 특히 권력이 가장 결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흐름이 선분화 되기 시작하는 것과 끝나는 곳입니다. 학기, 학점이란 선분의 끝점에도 권력은 작동하지만 학교의 권력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곳은 입학과 졸업이라는 두개의 끝이죠. 그래서 어떤 흐름이 선분화되는 양끝점을 권력 중심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분성은 단지 일차원의 선분에만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개 끝점을 갖는 선분을 2차원으로 확장하면
선분성을 갖는 면이 되지요. 원환을 그리는 면은 그 선분의 한 끝을 고정한 채 회전시켜 얻어진 겁니다. 이를 3차원으로 확장하면 선분적인 입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굳이 선분적인 선으로 다루는 건 면이나 입체는 흐름을 표현하기 어렵고 또한 절단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선은 흐름과 절단을 다이어그램 적으로 사고하는데 가장 적합합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분열분석이 겨냥하는 것은 개인들 만큼이나 집단들을 가로지르는 선의 배치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실천은 선들을 그리는데 능동적으로 관여하며 그 선들과 동일한 위험 내지의 변이에 부딪힌다. 분열 분석은 선들을 풀어주며 이 선들은 또한 그만큼 삶의 선들 문학 내지 예술작품의 선등 한 사회의 선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이항적, 원환적, 선형적 이라는 3가지 형태의 선분의 대해 말했는데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상이한 유형의 선분성입니다. 하나는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고 다른 하나는 경직된 물적 선분성의 선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유형의 선이 하나 더 해집니다. 탈주선이 그것입니다.  

경직된 선분성은 뚜렷하게 분할되고 계산과 예측이 가능한 양상으로 작동합니다. 국민,  계급 같은 거대 집단 뿐 아니라 집단의 원소가 되는 개인이나 관계 감정도 이런식으로 선 분화되어 있습니다. 소속된 원소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용하기에 모드를 동일화 시키는 힘이 강력한 선분성입니다. 이 몰적인 성분에서 빠져나가는 유연한 양자적 그림이 있습니다.  대학이나 취업이 요구하는 걸 하지 않고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는 학생들, 남자인 것 같은데 여성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비밀스러운 지하 활동을 하는 잠행자들 물론 이들도 모호 하지만 나름의 경계를 같기에 선분화되어 있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단의 경계가 모호하고 절단 방식이 유연하다는 점에서 유연한 선분성을 갖고 있습니다.

경직된 선분성은 절단의 기준이나 방법을 소속된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동시키기에 물적 선분성이라고 합니다. 너는 사내 자식이 왜 이딴 일로 우는 거야,  여기는 학교니 시험 보기 싫으면 나가,  몰적이라는 말은 기체 역학에서 나온 말인데  6.02 곱하기 10의 23승계의 분자들을 하나로 묶은 단위를 표시합니다. 분자 하나씩 다루어선 기체 상태를 서술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수만큼의 분자들이 동질적이며 동일하게 움직인다고 가정하여 그 전체가 하나인 것처럼 서술하는 겁니다. 개개 분자의 특이한 성질이나 운동은 물적 동일성을 표시하는 통계적 평균속의 작은 편차 중 하나가 되고 맙니다. 

브라운 운동처럼 물적 평균으로 서술할 수 없는 특이한 분자적 운동이 있습니다.  물적 선분성에서 벗어난 움직임에 감염되어 함께 움직이는 이웃이 나타날 때 편차로 환원될 수 없는 분자적 운동이 시작됩니다. 이웃한 것에서 다시 이웃한 것으로 감염되며 확산되는 분자적 선들이 그려지게 됩니다. 물론 이런 분자적 선들 또한 선분성을 같습니다. 드래그 퀸과 드래그 킹, 팸과 부치 같은 선분들이 그런 경우이지요.  엄격한 지하 조직이나 비밀 조직은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 다시 물적인 선분성의 선으로 경화된 경우입니다.  

분자적 선이 기존의 물적 선분성의 선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시작할 때 창조적 탈주선이 그려집니다. 가령 시험이 싫다고 거부하던 이들이 증식 되면서 새로운 교육의 장을 착안 하게 될 때가 그런 경우 겠죠. 그런데 물적인 권력으로 인해 실패하게 될 때 혹은 새로운 걸 창조하는 구성적 능력이 소진될 때 이 다른 욕망은 기존 세계에 대한 분노나 혐오에 정념이 되기 쉽습니다. 이런 정념이 절망과 저주의 정념으로 이어질 때 탈주선을 그리던 분자적선은 파괴와 죽음의 선을 그리게 됩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나치즘이 그런 경우라고 합니다. 그것은 현행화된 니힐리즘이고 전쟁만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 기계 이며,  죽음 이어 만세를 외치는 자살적 국가였다고 합니다.  물적 전체주의와 구별되는 이런 분자 적인 파시즘은 나치 나 네오 나치 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혐오의 정념이 확산되며 증식되는 대중 운동들도 이러한 경우에 속합니다.  현행의 세계에 대한 극히 정당한 분노에서 시작된 운동조차 창조적 구성 능력을 잃고 혐오의 정념 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이런 길을 가게 됩니다.

선분성과  관련해 가장 흔한 오해는 물적인 것은 집단적인 것이고 분자적인 것은 개인적 이라는 생각입니다.
물적 동일성을 가진 개인들이 많지요. 흔히 말하는 개성은 대게 물적인 선분안에 있습니다. 분자적인 것은 개인 이하이거나 개인 이상입니다. 돈과 교환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연대의 욕망들이 있고 증여의 작은 행동들이 있습니다. 일시적 이거나 부분적 이라는 점에서 개인 이하인 그런 것의 흐름을 따라갈 때 개인은 물적 성분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또 개인의 분자적 이탈은 그의 감염되는 이웃이 생겨나 개인 이상으로 증식 되게 될 때 물적 선분안의 편차를 넘어서 분자적인 운동이 됩니다. 

분자적인 것은 경직된 물적 격자 들을 빠져나가는 누수와 범람의 흐름과 관련된 것이지 개별적인 이탈의 편차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분자적인 것은 개인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계급은 생산관계상 의 지위나 기능에 의해 규정된 몰적 집단 이지만 대중은 자신이 소속된 곳에서 벗어난 이들이 모여 들며 형성된 분자적 집단입니다. 즉 대중이란 이웃한 것들과 상호 작용하며 조건에 따라 상이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미시적 요소들의 흐름입니다.  이는 정치적 대중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은행이나 기업의 회계 단위 같은 경제적 선분을 통과하며 흘러가는 화폐 대중,  도로를 따라 흘러가는 자동차 들로 이루어진 교통 대중 등등이 있죠.

물적인 것이 것이 거시적이라면 분자적인 것은 미시적 입니다. 거시 정치와 미시 정치의 구별은 이와 상응합니다. 그러나 미시 정치는 가정이나 연인 등 일상의 작은 영역에서 작동하는 정치가 아니며 미시적 이라는 말은 단지 규모나 크기가 작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미시 정치란 분자적 감염의 양상으로 형성되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 입니다. 대중은 규모나 크기가 작지 않고 큽니다. 그런데도 미시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것이 거시 정치가 계급이나 국민 등 거대 집단의 이해관계 같은 규정성을 통해 정치를 사고 한다면 미시정치는 하나하나를 보면 작다고 할 수 있는 분자적 원소들의 운동 양상을 통해 정치를 사고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작동 방식입니다. 국가나 계급 같은 몰적인 집단은 하나의 중심에서 방사되는 명령어나 기준에  공명하며 하나의 구성체로 움직인다면 대중이라는 분자적 집단은 수평적이고 분자적인 감염에 의해 흐름을 형성하며 움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전체주의와 파시즘을 구별합니다.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 는 국가 장치에  상응해 개인들이 공명하거나 복종하며 작동한다는 점에서 물 적입니다.  파시즘은  분자적 감염에 의해 집단적 의지가 형성되고 증식된 다는 점에서 분자적 입니다. 그렇기에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의는 대중 운동이 없습니다.  반면 파시즘은 일차적으로 대중 운동 입니다. 나치즘만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감염되며 파괴와 죽음의 검은 구멍을 향해 흘러가는 운동은 모두 미시 파시즘 입니다.  

따라서 몰 적인 것은 나쁘고 분자적인 것은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분자적인 것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때에는 대중 전체가 부정적 권력을 행사하게 되기에 더욱 더 참혹해지기 쉽습니다. 약간의 유연성이 사태를 좀 더 낫게 하는데 충분하리라는 믿음이야 말로 미시 정치학이 경계해야 할 첫번째 오류 라고 하면 이 때문입니다. 파시즘 처럼 죽음의 선을 그리는 분자적 운동은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게 되고 맙니다. 다른 한편 분자적 탈주와 운동은 물적 조직으로 되돌아 가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대중의 흐름은 흘러가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며 결국 낡은 권력과 과거의 물적 선분들이 재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분자적 탈주선을 새로운 물적 선분 성 으로 변환시키는 입니다. 분자적 이탈이 다시 시작 되더라도 말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라도 권력 중심은 자신의 손 밖에 있는 분자적 흐름을 따라갈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무능력 지대로 부터 능력을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정치가 란 이런 흐름과 접속하는 사람들 일 뿐이며 파괴의 검은 구멍을 뛰어넘는 양자를 방사하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이런 이유에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