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기호체제 혹은 기호계
흐름 자체는 우리의 포착을 언제나 넘어선다는 점에서 카오스 입니다. 카오스 속에서 살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지층화 합니다. 지층은 흐름의 분절에 의해 구성됩니다. 우리의 삶과 관련해 들로즈 가타리는 세가지 중요한 지층이 있다고 합니다. 의미화, 주체화, 유기체화의 지층이 그것입니다. 천의 고원 에서 언어학의 공준들이 의미화와 관련되어 있다면 어떻게 기관없는 신체를 만들 것인가는 유기체화와 그리고 몇 가지 기호체제들과 의미화 및 주체화와 관련된 고원이라 하겠습니다. 이 세지층들은 그것 없이는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삶의 지반이 되는 지층이지만 지층의 고유한 분절 방식대로 살게 한다는 점에서 삶을 보유한 지층입니다. 따라서 다른 삶을 만들고자 한다면 이 세지층에서 탈 지층화 운동을 시도해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또다른 지층으로 이행하는 것이 될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에 모든 지층에는 지층화된 분절에서 이탈하는 방향의 추상 기계가 작동할 수 있음을 덧붙여야 합니다.
기호계는 라캉의 상징계라는 말을 겨냥한 개념인데 기호체제와 거의 동일한 말로 사용됩니다. 기호체제는 체제라는 말 그대로 기호들이 권력이 작동하는 체제로 조직되어 있음을 명시 하려는 개념입니다. 언어학적 전이 이후에 이론적 통념에 따르면 우리는 언어로 항상 이미 질서화된 의미 체계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고 언어를 사용하려면 이미 조직된 언어들의 질서 기표들의 의미와 규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해 라는 말이 상투적이라 피하고 싶어서 마미추라고 말해봥야 못 알아 듣기에 서로 아는 기호 기존의 의무화 규칙에 따라야 합니다.라캉은 이를 기표의 물질성이라 합니다 . 기표들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고 강제하는 물질적 힘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강하게 말해 언어의 감옥에 갖혀 있는 거죠. 기호들이 하나의 체제를 이루고 있다함은 그것이 이처럼 강제력을 행사하는 체계임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기호체제 개념이 언어학적 패러다임이나 라캉의 상징계 개념과 유사한 점은 여기까지 입니다. 먼저 랑그의 단일성이나 오이디푸스적 관계의 보편성을 상징하는 라캉의 상징계와 달리 기호체제는 단일하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습니다. 여러가지 유형의 기호체제들이 있고 한 유형안에도 복수의 아니 수많은 기호체제들이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수많은 언어들이 있다는게 들뢰즈 가타리의 생각입니다. 다음으로 기호들의 의미화는 단지 기표들만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비신체적 기호들은 상관적인 신체와 함께 작동합니다. 어조라는 음성적 성분 표정이나 몸짓 리듬과 춤같은 신체적 성분 법정 이나 감옥들의 기계적 성분 국가나 도시 수렵민의 숲이나 유목민의 초원들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의미화를 다룰때 조차 기표의 형식이나 체제에 유난스러운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세번째 다시보겠지만 주체가 되는 것도 단지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서만은 아닙니다. 트리스탄 이졸데 트리스탄 이졸데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에게 말려들어가는 커플들은 정념에 끌려 주체화 됩니다.
천의 고원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네가지 유형의 기호체제에 대해 언급합니다. 1) 의미화하는 기표들에 의해 주도되는 기표적 체제, 2) 몸짓, 춤, 리듬 등 '자연적' 기호들이 음석적 기호들과 공존하며 경쟁하는 전기표적 체제, 3) 의미 없는 기호를 사용하거나 기호의 의미를 지워버린 기호들을 통해 작동하는 반기표적 체제, 4) 그리고 의미화하는 중심적 기호들을 배신하며 시작되는 탈기표적 체제가 그것입니다.
기표적 체제는 하나의 일반 공식을 갖는다고 합니다. 기호는 다른 기호로 소급되며, 무한히 소급될 뿐이다가 그것입니다.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지시체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자의적이라고 강조한바 있습니다. 가령 귀가 아주 긴 저 동물을 토끼라고 해야할 이유는 없으며 '두라', '밀론'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일단 토끼라고 하기 시작하면 토끼라고 해야만 알아 듣습니다. 기호가 자의적 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호는 사회적 규약이 되고 강제성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한국어를 잘 모르는 이가 토끼가 뭐냐고 물으면 귀가 아주 길고 뒷다리로 땅을 차며 뛰는 동물 이라는 식으로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묻게 될 겁니다. 귀가 뭐냐고 길고 그리고 뒷다리가 뭐냐고 그럼 다시 다른 기호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건 또다시 다른 기호로 이는 무한히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기호에서 다른 기호로의 무한 소급이 발생하는 거죠 기표는 기호로 넘쳐 흐르는 기호란 말은 이런 의미 입니다.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로 이어지는 기호의 사슬들이 존재한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기표적인 기호들은 하나의 랑그에 머물지 않습니다. 어떤 기호 사슬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어떤 기호로 소급되는 가에 따라 동일한 기호도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토끼라는 기호가 거북이 경쟁 등과 같은 기호로 소급될때 의미는 제약회사 피부 민감성 실험 등과 같은 기호로 소급될때와 달라질 겁니다 민족이란 단어도 생물학 인종 진화 등의 기호로 소급될때 의미와 제국주의 식민지 침략 해방 등의 기호로 소급 될때 의미는 달라지지요. 다른 기호를 통해 기호를 의미화 하는 체제이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기호들을 통해 기호들을 의미화할때 의미와 전체를 방향짓고 연결된 기호들의 사슬들 전반에 의미를 규정하는 특권적 기호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령 민족주의와 결부된 말들이라면 민족이, 정신분석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남근이, 생물학이나 생택학적 담론이라면 생명 같은 것이 그것이겠지요
관련된 다른 기호들은 모두 이 기호에 탯줄을 되고 있으며 그 기호들의 의미는 이 기호로 수렴됩니다. 달라 보이지만 실은 유사한 기호의 사슬들이 이 기호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이처럼 의미화의 중심에 있는 이 특권적 기호를 대문자 기표, 지고한 기표라 하는데 전제 군주의 얼굴 혹은 신의 얼굴과 상응한다고 합니다. 한 기호가 다른 기호로 소급된다고 했지만 그러한 소급은 결국 전제 군주의 기표로 언제나 귀착 되기 마련 입니다. 가령 정신 분석에서 이러 저런 증상들은 트라우마를 거쳐 아버지 어머니 오이디프스로 결국은 남근으로 소급됩니다. 혹은 어머니를 거쳐 결여 그 결여를 메우는 욕망의 대표인 남근으로 귀착 됩니다. 라캉처럼 큰 타자를 말하고 타자의 욕망을 말해도 결국은 동일한 지점으로 귀착됩니다. 역으로 큰 타자든 결여든 오이디푸스든 무얼 말해도 그 기호의 의미는 결국 하나아고 모두 남근의 등과물입니다. 민족을 중심에 두고 있는 기호들의 원환도 그렇습니다. 민족이든 역사든 침략이든 사명이든 억압이든 해방이든 모든 기호는 민족이란 말에 등가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표적 기호체제는 모든 기호가 오직 하나의 기호로 귀착된다는 점에서 편집증적이고 전제군주적 기호체제라고 합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새로운 기호를 추가하거나 다른 기호들의 사슬로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되게 중심에 자리잡은 특권적 기표를 새로운 기호로 해석해주는 일에 불과 합니다. 이런 해석의 사제들은 전제군주 기표의 관리들이죠. 아주 달라 보이는 기호들이 사실상 하나의 기호의 대체물이란 점에서 이체제는 속임수의 체제입니다 계속 추가된 해석이란 속임수의 제안에서 의미화의 동심원들을 추가하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 자체로는 의미없는 이 기호들이 겹겹의 사슬을 이루며 의미화를 작동하게 하는 실체는 전제 군주의 얼굴입니다. 얼굴에 의해 기표들은 의미화 됩니다. 반면 이러한 의미화에서 벗어나는 자는 전제 군주의 얼굴을 외면하는 자입니다. 기표적 체제는 이런 자들에게 사형수 내지 속죄양이라는 부정적 가치를 부여합니다. 얼굴을 돌린자를 얼굴이 지워진 자로 만드는 겁니다.
전 기표적 체제의 기호들은 몸짓이나 리듬 감탄사나 비명소리 그림문자 등 자연적 코드에 따른 것이기에 되게는 별다른 설명없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다른 기표들로 소급되며 의미화 되는 기표적 체제와 대비 됩니다. 보고 들으면 즉각적으로 알아들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 역시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그저 자연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또 웃음이나 눈물 손을 지켜드는 것은 의미가 명확해 보이지만 실은 상황이나 성격에 따라 적잖이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또 분노를 표현하는 몸짓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요. 일부 야만인들의 시기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행위이니 전기표적 기호로 할 수 있겠는데 그기호의 의미는 부족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그래서 전기표적 기호는 다의성과 이질성을 갖습니다. 이는 기표에 의한 권력의 장악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달라보이는 기호도 사실은 하나인 기표적 체제와 달리 비슷해 보이는 것도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반기표적 기효체제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는 것은 번호적 기호 입니다. 이때 번호는 수지만 순서와 단위 원을 갖는 계산 가능한 수가 아닙니다. 흔히 명목수라고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축구 선수의 등번호 또는 8사단 6대대 같은 군대의 번호가 그런 경우이지요 군대의 이러한 기호는 십호대 백호대 천호대 등으로 조직화하여 이름을 붙이는 유목민의 번호적 조직을 국가 장치가 영유한 것입니다. 이 번호적 기호는 계산되는 수는 아니지만 전혀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십호대 열개면 백호대 하나가 되고 8개 중대 2개 사단 등 처럼 수를 세고 크기도 비교할 수 있으니까요 단위원을 갖기에 정확하게 비교되고 계산되는 수가 세어지는 수라면 이러한 수는 세는 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는 수가 전쟁기계의 번호적 조직과 상응 한다면 세어지는 수는 국가 장치의 조세 기술에서 기원합니다. 설현 문자들으로 남아 있는 초기의 문자들이 조세와 관련된 문서라는 게 이를 시사합니다. 세는 수의 숫자는 자의적 기호라는 점에서 기표 지만 다른 기표로 소급되지 않거나 그러길 거부하는 기표란 점에서 반기표 입니다.이를 잘 보여주는 것은 암호 입니다. 암호는 의미화를 의도적으로 중단 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기호이지요 암호를 코드화하고 탈코드화는 데 중요한 것 역시 숫자입니다. 더하고 빼는게 무의미한 숫자들이죠.
탈 기표적 체제는 기표적 체제에서 벗어나는 사건이 발생한 지점에서 작동합니다. 해석의 사제들이 만들어 내는 의미화의 동심원사이를 오가길 중단하고 그 중심에 있는 전제 군주의 얼굴로 부터 얼굴을 돌리는 겁니다. 탈주선을 그리며 기표적 체제 밖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러한 이탈은 추방과 방황으로 이어지지만 탈주자는 새로운 의미를 제공하는 기표들을 붙잡기 마련 입니다. 주체화가 발생합니다. 탈기표적 체제가 주체화라는 절차를 통해 정의된 다 함은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여기서 들뢰즈 가타리는 알튀세르의 호명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알튀세르는 자신을 부르는 신의 호명에 답함으로써 히브리인의 해방자라는 주체가 되지만 이는 동시에 신이라는 큰 주에의 시민이 된서을 뜻한다고 합니다. 주체와 예속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개념에는 상징계가 할당한 자리를 자기자리라고 상상적으로 동일시하는 라캉의 주체개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주체화가 탈주화 포섭의 반복적 궤적을 그린다고 할때 들뢰즈 가타리도 이런 양의성을 받아들인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라캉이나 알튀세르의 주체화 절체에는 탈추선이 없습니다. 큰 주체 내지 큰 타자가 할당하는 자리를 받아 들이는 것일 뿐이니 거기서 주체화란 일종의 오인 내지 속임수라 하겠습니다. 반면 들뢰즈 가타리의 주체화는 의미화 하는 체제를 이탈하는 탈주선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주체화는 단지 오인이나 속임수 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속임수와 대비되는 배신에서 시작합니다. 또 하나 들뢰즈 가타리는 주체화에서 정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배신이나 탈주의 일차적인 이유는 정념입니다. 가령 자기 주군의 왕비가 될 사람을 모시러 갔던 트리스탄이 주군을 배신하고 이졸대와의 사랑에 빠져들어가는 것은 정념때문입니다. 처음 보는 이를 사랑하게 한다는 묘약이 등장하지만 사실 모든 미친 사랑이란 처음 보는 이에게 매혹되어 휘말려 들어가는 정념으로 시작하니 묘약이란 그 정념의 표현인 셈이죠 이렇게 정념적 탈주로 시작되는 주체화는 다시 다른 주체의 물음에 대답하며 예속적 주체화의 길로 넘어 갑니다. 사랑의 주체란 사랑의 노예를 뜻하자나요 모세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이집트인이 아님을 알게 된 곳에는 히브리적 정념으로 이집트인을 죽이고 파라오를 등지게 됩니다. 그가 신의 호명에 답하게 된 것은 이처럼 정념에 이끌려 사고를 치고 왕을 배신하고 도망치던 와중에 일어난 일이죠.
이러한 이유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기표적 체제가 수많은 기표나 해석으로 그중심에 있는 전제군주를 가리는 속임수의 체제라면 탈기표적 체제는 전제군주에게서 얼굴을 돌리며 시작하는 배신의 체제라고 대비합니다. 주체란 배신이란 말이죠 그러나 이 배신은 자신을 부르는 다른 주체와 공명하며 주체가 됩니다. 누군가의 부름에 예속되는 거지요 그렇기에 기표적 체제가 흰벽에 의미화하는 목소리에 주파수를 세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탈 기표적 체제는 주파수간 공명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객관적 주파수와 주관적 공명이 두가자의 기호체제에 대응하는 두가지 잉여성이라 함은 이런 뜻입니다.
이러한 주관적 공명의 최대치는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등식을 통해 보게 되는 코기토적 이중체 입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장애물과 주저함이 있지만 서로를 부르며 서로 끌려들어가는 커플의 이중체 입니다 부르고 답하는 호명의 주체화는 서로를 향해 끌려들어가는 상이한 강도의 공명을 통해 진행됩니다. 이러한 공명의 최대치는 다른 모든 것을 등지고 오직 서로를 향해 끌려 들어가는 공명입니다. 커플의 검은 구멍이 생겨나는 거죠. 이는 예속화의 극단을 이루기에 탈주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기 쉽습니다.
네 유형의 기호 체제에 대해 말 했지만 현실의 기호체제는 이 상이한 기호체제가 뒤섞여 작용하는 혼성적 체제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기호체제는 그와 대응 되는 다른 기호체제로 변환되기도 합니다. 어떤 기호계가 전기표적 기호계로 변환되는 것은 유비적 변환, 기표적 기호계로 변환되는 것은 '상징적 변환', 반기표적 기호계로 변환되는 것은 '전략적 내지 논쟁적 변환' 탈기표적 기호계로 변환되는 것은 '의태적 내지 의식적 변환' 이라 합니다. 한지층에서 다른 지층으로 이행하는 것인데 이와 달리 탈지층화하는 변환도 있습니다. 다이어그램적 변환이 그것입니다. 더 이상 형식화 하지 않는... 비형식적 기호-입자를 추출하기 위해 기호체제나 표현형식을 포착하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