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코드화와 코드의 잉여가치
안티 오이디푸스 이후 코드화는 영토화와 짝을 이루지만 동시에 대비되면서 그만큼 자주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코드란 암호나 부호, 규칙 등 을 뜻하는데 정보 통신이나 언어 활동과 결부되어 흔히 사용됩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알아 들을려면 그 말을 사용하는 코드를 알아야 합니다. 문법은 물론 소리와 단어들을 분절하는 규칙도 알아야 합니다. P와 F을 구별하는 분절 규칙이 없기에 한국인은 Punk와 Funk를 구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 둘은 아주 다른 종류의 음악이지만 한국어로 표기하면 둘다 펑크가 됩니다. 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와 입술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뚜렷하게 내서 내가 지금 내는 소리가 f 로 시작하는 말임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목청껏 Puck You 라고 해도 미국인은 뭔 소리야 할 겁니다. 한국어의 는 원래 f 발음이 없으니 평소대로 발음하면 Puck You 될 겁니다. 나중에야 뭔 소린지 알아 들은 상대방은 오히려 웃을겁니다. 그걸 욕이라고 한 거냐고. 욕을 하려해도 코드를 따라야 합니다.
암호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도록 부여 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전송받은 상대가 해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은닉된 코드가 사용됩니다. 코드화 한다 함은 기호 사용 규칙을 이처럼 부호화 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그 규칙에 따라 기호를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어진 기호 사용 규칙에서 벗어나는것을 탈코드화 라고 합니다. 그렇게 규칙에서 벗어난 기호들의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것을 재코드화 하라고합니다. 주의할 것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어떤 기호들을 다른 기호 들로 바꾸는 것을 코드화라고 바로 그 규칙에 의해 그 기호들을 원래 기호로 되돌리는 것을 탈코드화라고 하는 정보 이론이나 소통 이론의 통상적인어법과 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A T G C 로 구성되는 유전자 정보와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도 코드를 통해 작동합니다. 세 개의 뉴클레오티가 결합하여 아미노산의 코드를 형성하고 그 아미노산 분자들이 또 다른 코드에 따라 결합되어 단백질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DNA 의 유전자 코드를 RNA가 복사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스플라이싱(Splicing) 자리바꿈 인자 레트로바이러스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탈코드화가 발생합니다. 유전 공학은 역전사 유전자를이용해 유전자 코드를 목적에 맞게 재코드화 하려는 기술입니다. 이처럼 의미화의 지층 뿐 아니라 유기체의지층에서도 코드화와 탈코드화와 재코드화는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코드란 말은 법이나 규약 을 뜻하기도 하고 그처럼 명시적 이지 않은 규칙들 도 지칭합니다. 신분적인 코드, 직업적인 코드, 젠더적인 코드, 종교 의례나 식사매너, 식사나 의복, 요리를 규제하는 다양한 문화적 코드들이 있습니다.
만나고 헤어질 때의 예절, 교통신호나 스포츠 등 게임의 규칙도 코드입니다. 인간이 사는 것 어디나 코드가있습니다.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규칙에
충실하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강요합니다. 사회적 코드에 충실히 복종할 때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주체가됩니다. 사회적 코드는 이처럼 주체화의 지층을 구성하고 유지합니다. 그런데 사회적 코드는 사회를 상이한코드에 따르는 집단들로 분할하고 위계화 합니다. 자유인과 노예 귀족과 농민은 결코 인간 같은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없는 상이한 질의 집단 입니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엄격한 분화를 유지하는 카스트는 이런 코드화 된 집단의 불연속성과 위계성을 극단적으로 강화한 체제입니다.
주체화는 이렇게 분할된 상이한 코드에 따라 상이한 주체들을 생산합니다. 이처럼 상이한 코드들의 실존은상이한 집단에 속한 이들에게 의문과 저항을 야기합니다. 신분에 반하는 투쟁 들이 역사적으로 반복되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투쟁의 양상이 아니어도 주어진 코드에서 이탈하려는 시도들도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농노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도망치는 흐름도 있고 공동체로부터 추방되어 표류하는 이들도있습니다.
젠더적 코드의 강요를 벗어나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연인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체화의 지층에서 이탈하는 탈주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이런 탈주선이 집합적인 유출의 흐름을 형성할 때 주어진 코드로 부터탈코드화 된 흐름이 형성됩니다. 탈코드화 된 흐름이 범람 하게 되면 신분, 직업, 젠더 등의 지층을 형성하고 던 코드들이 와해 됩니다. 가령 서구의 봉건 사회는 도시를 찾아 도망치는 탈코드화 된 흐름에 의해 또한엔클로저에 의해 토지를 잃고 부랑하게 된 농민 들의 탈코드화 된 흐름에 의해 해체 되게 됩니다. 그러나 이처럼 탈코드화된 흐름이 범람 하게 되면 사회나 질서 혹은 통치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게 다른 코드들로 이 흐름을 포획하려 하게 됩니다. 재코드화하는 시도들이 발생하는 겁니다. 코드화가 기존의 상이한코드들을 와해 시키고 탈코드화 된 흐름을 유출시켜 거대한 하나의 코드로 통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초코드화 하라고 합니다.
가령 중국 최초의 거대 제국인 진은 이전의 부족 집단들이 나 작은 국가들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해 씁니다 이는 이전 사회의 코드 에 속했던 신분이나 직업에서 이탈하는 탈코드화된 흐름을 야기합니다. 제국의 국가는이들을 광산 이나 제련 등 제국적 필요에 따른 새로운 영토로 영토화 합니다. 영토화가 코드화가 아니라 탈코드화와 짝을 이루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 왕조는 도량형과 화폐, 문자와 역등을 통일 합니다. 이전의 코드들을 해체하고 새로운 하나의 코드로 초코드화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신분이나직업 등의 새로운 집단의 분할과 위계가 재 도입되기에 이러한 초코드화는 여전히 하나의 코드화의 일종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와 달리 초코드화의 일종이지만 탈코드화 된 흐름을 다시 위계화된 집단으로 나누지 않고 각 집단에 상이한 코드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코드 없는 체계로 통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엔클로저로 인해 토지를 잃은 거대한 불황의 흐름이 출연하는데 이들은 직업이나 신분을 잃은 만큼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토지로부터 탈영토화 되고 신분에서 탈 코드화 된 이 잠재적 노동력의 흐름이 자본의 흐름 과 만날 때자본주의가 탄생합니다. 자본주의는 이들을 다시 신분 으로 재코드화 하지 않습니다. 시장에서는 신분이 무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죠. 내 상품을 얼마에 사겠다는 건 지만 중요합니다. 시장의 논리는 모든 이들에게이런 종류의 등가성을 부여합니다. 인간이란 보편적 범주가 이로부터 출연합니다. 이전에는 신분적 코드가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규제 했습니다. 코드가 사라지면 이런 규제가 불가능해집니다.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홉스의 질문은 이로부터 나온 겁니다.
자본주의는 신분에 따라 정해진 코드 대신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규칙의 체계를 수립합니다. 고용을 통해 직업을 얻어라. 노동을 통해 가치를 생산 하라. 노동을 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등가교환의 따라물건을 사고 팔라. 모든 가치의 척도는 돈이다 등등. 이전의 코드로 부터 이탈한 흐름 전체를 하나의 보편적규칙들의 체계로 통합했다는 점에서 이 또한 초코드와 의 일종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제국적 초코드화가 위계적 지위를 갖는 집단으로 사람들을 재분할하고 속한 집단에 따라 다른 규칙을 강요하던 것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일종의 공리처럼 자명해 보이는 보편적 규칙들의 체계로 통합했다 는 점에서 이를 공리계화 라고 합니다. 하나의 지층 안에서 발생한 탈영토화 운동이 다시 어떤 영토로재영토화 되고 다시 탈코드화 된 흐름도 재코드화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탈코드화란 기존의 코드를 대대적으로 부수어 없애기도 하지만 특정 요소를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유럽의 고전음악 에는 여러 형식의 코드들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화성 조성의 코드, 대위법이나 소나타 등 학곡 형식의코드, 협주곡 이나 교향곡 등의 장르적 코드 등등 악보로 그려진 하나의 작품은 복수의 코드들이 중첩된 결과물 이죠. 연주와의 관계에서 보면 악보 또한 연주자의 행위를 반복하게 하는 일종의 규칙이란 점에서 또 하나의 코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연주자는 그 악보 코드에 따라 연주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속도 내지 템포는 주어진 리듬 패턴이나 선율을 그대로 든 채 탈 코드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안단테, 프레스토 등 템포 기호를 악보에 적어 두지만 사실 템포 자체는 연주할 때마다 달라집니다. 연주자가 자신의 해석을 강조하기 위해 크게 바꾸기도 합니다. 글렌 굴드는 느린건 더 느리게 빠른 건 더 빠르게 연주하여 자기 색깔을 만듭니다. 터치 등 악기 소리에 강도도 악보를 그대로 둔 채 바꿀 수 있습니다. 째즈 뮤지션은 주제의 진행을 따르면서 선율을 바꿉니다. 이것들은 정해진 악보의 명령으로부터 이탈하는 유연성이나 탄력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여백 이라 하겠습니다. 이 여백이 허용하는 가변성은 그것만으로도 탈 코드와가능하게 해줍니다. 이러한 여백을 들뢰즈 가타리는 탈코드화의 여백 이라 합니다. 언어도 그렇습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읽거나 말할 때마다 우리는 다른 톤으로 읽거나 말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이 톤을 비명 소리에 가깝게 크게 하거나 몽골인들의 후미 창법 처럼 아주 낮은 목소리로 발화하면 애초에 기호에 담겨있던 의미는 사라지고 비언어적인 소리 로 바뀝니다.
“으, 이건 동물의 소리야 !” 여기서 음성적 또는 의미화 하는 언어로 부터 벗어나는 탈 코드화의 여백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반복되며 어떤 새로운 규칙을 갖게 되면 다른 유형의 소리로 재코드화 됩니다. 스트라빈스키는 무용 음악 봄의 제전에서 악센트의 규칙성을 깨는 불규칙한 강박을 사용해서 서양음악의 박자 구조를 탈코드화 했죠. 메시아앙은 이렇게 탈코드화 된 박자를 비서구 음악의 리듬을 이용하여 새로운 리듬 선법으로 재 코드 합니다.
이처럼 탈코드화의 여백을 통해 발생하는 탈코드화와 재코드화를 코드변환이 라고 합니다. 이러한 코드 변환은 대게 어떤 코드의 사슬로 부터 일부를 떼어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를 들뢰즈 가타리는 코드의 잉여가치를 포획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코드는 둘 이상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조각들은 하나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슬에 묶여 있기에 조각들은 자유롭게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탈코드화의 여백을 통해 일부 조각을 떼어내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죠. 다른 코드 속에 넣어서 그 일부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떼어낸 조각은 애초에 갔던 가치와 다른 가치를 갖게 됩니다. 그 조각이 갖는 잠재성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갖던 가치 이상의 가치란 점에서 이를 잉여 가치라고 합니다.
이런 잉여가치는 애초에 속했던 코드안에서의 가치를 초과하는 잉여 가치란 점에서 코드의 잉여가치 입니다. 코드 변환을 통해 어떤 코드의 조각을 이용하는 것은 이러한 잉여가치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영유하는것입니다. 이를 잉여가치의 포획 이라고 합니다. 앞서 음악 연주자들은 자신의 음악적 해석이나 스타일을위해 작곡자가 악보나 이전 음악 속에 코드화 했던 소리들을 떼어내 코드의 잉여가치를 포획하는 것이라고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애초에 맑스가 경제학적 개념으로 정의해 놓은 잉여 가치란 개념이 해석이라는 주관적개념으로 해소되는 것 아닌가 하고 반문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진 않은데 먼저 경제학의 경우를 보자면 원격지 교역을 통해 상품을 팔아 얻는 이득이 바로 코드의 잉여가치 입니다. 상품의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는 사회마다 다르게 코드화 되어 있습니다. 소의 내장이나 뼈는 미국에선 먹지 않고 버리지만 한국에선 훌륭한 음식 재료지요. 러시아에서 사슴의 뿔은 별다른 쓸 모가 없지만 한국에선 귀한 약재죠. 이처럼 어떤 사회의 코드화 된 가치의 사슬로 부터 내장이나 뿔 같은 일부 조각을 떼어 내어 코드를 달리하는 사회속으로 이전 시키면 코드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잉여 가치를 포획할 수 있습니다. 원격지 교역에서 상인들이 얻은 이득은 이처럼 코드의 잉여 가치 경제적 형태를 보여 줍니다. 생명체의 생존에서도 코드의 잉여가치는 널리 발견 됩니다. 말벌의 형태를 모방하여 말벌을 유혹하고 그것을 이용해 수분하는 난초 나 이웃한 식물의 잎을 모방하는보킬라 트리폴리아타의 의태는 생명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개체들로부터 코드의 잉여가치를 포획하는 경우입니다.
자궁속에 인간의 태아가 모체의 면역반응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유전체 안에 있는 ERV-3 라는 레트로바이러스의 유전자 코드 덕분입니다. 애초에 바이러스의 유전자 사슬에 속해있던 유전자 조각들을 포획해 코드의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것이죠. 생명의 자리란 탈지층화의 잉여가치를 뜻한다는 들뢰즈 가타리 의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인간의 유전체 안에는 유전자 보다 많은 바이러스나 미생물 유전자가 들어 있다고 하죠. 알파프로텍터박테리아나 고세균의 뜻하지 않은 공생은 동물이나 식물의 유전 형질 자체가 이질적인 미생물들의 유전자들을 탈 코드와 하여 구성된 것임을 함축하합니다. “코드는 그에 고유한 탈코드와 과정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유전적 표류’ 없는 유전학 은 없다. 현대 돌연변이 이론은 코드가 필연적으로 개체군과 연관되어 있으며 본질적인 탈코드화의 여백을 갖는다는 것을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이는 코드들 간의 번역이 아니라 우리가 코드의 잉여가치 또는 방계적 소통이라고 부르는 단일한 현상과 관련된다.”
그런데 안티 오이디푸스에는 이와 약간 다른 뉘앙스로 코드의 잉여 가치 개념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포틀레치나 쿨라 같은 의례화된 증여에서는 주고 받는 선물에 비평형성이 두드러집니다. 말하자면 받은 것보다 많은 것을 주는 자가 이기는 게임입니다. 이때 많은 것을 주는 자는 위신을 획득합니다. 이는 주고받은 선물의 비평형성을 만회하는 요소인 셈인데 이 책에선 이를 코드의 잉여가치 라고 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형벌의 기원에는 죄인이 끼친 손해만큼 고통을 주는 생각해보면 기이한 방정식이 있죠. 이는 죄인의 고통에서 눈이 없는 쾌감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이 쾌감이 바로 코드의 잉여가치 라고 말합니다. 이는 코드의 조각을 이용해 얻는 잉여가치 보다는 특정한 코드 안에서 선물이나 채무가 야기한 비평형성과 짝을 이루는 어떤 대가를 뜻합니다. 이는 다른 코드로 이행하는 데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코드 안에 있지만 명시되지 않은 어떤 이득입니다. 이러한 뉘앙스의 개념은 천의 고원 에 가면 사라지고 코드의 잉여가치는 어떤 코드의 조각을 다른 코드로 옮기는 코드 변환과 대응되는 개념으로 명확하게 한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