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유머와 아이러니(Humor and Irony)
유머와 아이러니는 흔히 수사학적 기술에 속한다고 합니다. 들뢰즈는 여기서 더나아가 물음을 던지고 답을구하는 철학적 스타일의 자리를 유머와 아리어니에 부여 합니다. 이때 스타일이란 니체와 마찬가지로 사유나 철학의 내용과 상관적인 표현 형식을 뜻합니다. 즉 단지 기교가 아니라 내용 자체를 끌고 가거나 내용을역으로 규정하는 사유의 표현형식이란 말입니다.
일단 간단히 대비하면 아이러니는 묻거나 반문하는 형식으로 거슬러 올라가 답을 제시하는 기술이라면 유머는 답하거나 추종하는 형식으로 내려가며 물음을 던지게 하는 기술입니다.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가졌던 것은 아이러니 입니다. 소크라테스식 아이러니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이는 소크라테스 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주류 철학의 스타일과 가까이 있습니다. 그에 반해 유머는 단지 희극적 성격이 예술이나 언행 흔히 농담 같은 극히 주변적인 지위만을 갖고 있었지요. 들뢰즈는 오랜전통의 아이러니에 반하여 유모의독자적인 지위를 부여합니다. 뿐만 아니라 반문의 형식을 취하는 아이러니의 부정적 방법과 대비되는 유머의 긍정적인 방법에 조금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너무 단순화 하는게 될 겁니다. 특히 아이러니의 위상이나 그에 대한 평가는 길지 않은 시기에 달라져 갑니다.
먼저 아이러니는 상대방이 하는 말에 대해 이유나 근거를 묻는 물음의 기술입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에서 즐겨 사용한 방법입니다. 가령 상대방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 를 물으면 상대는 정의로운 사람들이나 사례들을 들어 말합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다시 묻습니다. “그런 사례가 아니라 그 사례들을 정의롭다고 하게할 근거 내지, 원리가 무엇인가가 ?” 가 내가 묻는 것이지. 즉 무엇이 그들이 정의롭다고 하게 하는가 ? 덕이나 아름다움 등 모든 핵심 개념에 대해 이런 물음을 던져 결국 상대방이 모르겠다고 말하게 만듭니다. “너 자신을 알라” 즉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는 명법을 이런식으로 상대에게 밀어 붙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지에 내몰린 상대애게 정의란 무엇인지, 덕이란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그 처럼 물음을 통해좀더 상위의 답으로 근거 내지 원리로 올라가는 상승의 기술이 아이러니 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원리를 제시하고 수용케 하는 기술인 셈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항상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내가 잘 몰라서 묻는 건데, 현명한 자네가 알려주게” 알다 시피 자신이 무지하지 않으면서 무지를 가장하여 묻는 것이고, 이로써 뭔가 안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무지를 폭로하는 겁니다. 가장의 방법을 이용해 상대를 궁지에 몰아 넣고 그의 무지를 최대치로증폭시켜 드러내는 겁니다. 입으로 하는 말과 반대로 자신은 높이고 상대는 낮추는 방법이란 점에서 다시 한번 상승의 기술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식 아이러니라는 말에는 조롱과 풍자, 면박이 함축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상대방을 무력화 시킨 부정성의 힘이 아이러니의 동력이라 하겠습니다.
들뢰즈는 데카르트나 칸트의 의심을 하고 물음을 던지는 방법 또한 이런 아이러니 개념에 속한다고 봅니다. 데카르트는 감각적인 것이나 학습된 것 모든 통념들에 대해 의문을 던집니다. 그런 의심을 통해 더는 의심할수 없는 확고한 근거에 도달하려 하죠. 나라는 한 개인의 판단에 대한 의심을 통해 그의 모든 판단을 떠 받쳐주는 가장 높은 원리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칸트는 흄의 회의주의로 인해 진리의 가능성이 사라진 듯 보이는상황에서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알 수있는가 ?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 자신의 능력에 대한 질문을 통해 그 또한 의심스러운 경험에 좌우 되지 않은 선험적 형식을 찾아 냅니다. 진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형식을, 이들 뿐아니라 진리나 확고한 것 최고의 원리나 근거를 찾으려는 철학자는 모두 이런 의심과 물음을 통해 사유합니다. 모두 아이러니의 철학이지요.
물음을 던지며 좀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거기다 답을 적는 아이러니와 반대로 유머는 하라는 대로 충실하게따라 내려 감으로써 그 명령이나 규칙을 물에 빠뜨리는 기술입니다. 카프카의 소설 <선고>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 작품에서 아들 개오르그에게 장광설을 늘어 놓던 아버지는 끝내 아들에게 물에 빠져 죽을 것을선고합니다. 그러자 게오르그는 그 선고 대로 집을 뛰쳐나가 다리 위에서 강으로 몸을 던집니다. “그래도 전부모님을 사랑했습니다”라고 중얼 대면서, 명령에 극히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거죠. 당혹스럽게도 소설은거기서 끝납니다. 이거 뭐지 싶은 결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에게 “나가 죽어라” 라고 했을때 그가 정말 나가 죽어 버린다면 어떨까요 ? 그의 죽음은그 명령에 대한 과도한 충실함을 통해 그렇게 말한 사람을 난감하게 하지 않을까요. 그런 명령 자체를 죽음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을까요.
아이러니와 유머는 웃음을 이야기하는 상반되는 두 방법이기도 합니다. 상승의 방법인 아이러니는 상대를바보로 낮추며 웃음을 야기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항상 그렇게 하죠. 하강의 방법인 유머는 자신을 바보로낮추며 웃음을 야기 합니다. 아이러니의 웃음이 고상한 자리를 차지한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부정적 웃음이라면 유머의 웃음은 낮은 사람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 고상하지 않은 세상을 긍정하는 따뜻하고 여유 있는 웃음 입니다.
중국의 선승 다나는 이런 유머의 아주 멋진 사례를 제공합니다. 어느 겨울 날 다나 스님이 몹시 가난한 절에머물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참기 힘들 만큼 추운데 장작이 없어서 불을 지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스님이 성큼 대웅전에 들어가 셋 있던 목불중 하나를 들고와 도끼로 뽀개 불을 뗐다고 해요. 이 얘기를 들은 주지가 놀라 달려와 소리를 지릅니다. “아니 어쩌자고 불상을 태우는 거요” “ 불상을 태워 사리를 얻으려고요” “ 불상을 태워 무슨 사리를 얻겠다는 거예요” “그래요 그럼 저기 있는 불상 두개도 마저 가져다 불을 땝시다”
소크라테스라면 여기서 주지에게 불상이 무언지 ? 나무조각을 불상으로 떠 받들게 하는 근거가 무언지 ? 즉부처란 무엇인지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나는 그런 걸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지의 비난 어린 물음에부처나 고승들의 시신을 태우면 사리가 나온다는 불교의 통념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며 능청스레 대답을하고 있지요. 이를 통해 불상과 부처를 동일시하는 통념이 단번에 웃음거리가 되며 와해 됩니다. 통념에 따라가면서 통념에 반하는 지점으로 통념을 끌고 내려가는 거지요. 의미로 채워진 통념을 무의미로 밀어너어부처나 불상에 대해 혹은 불도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겁니다. 이런식의 계열화를 들뢰즈는 역설이라고 정의 합니다.
여기서 다나는 상대방의 무지를 공격하며 더 높은 원리나 근거를 향해 상승하려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목불을 태워 사리를 얻을 거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의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렇게 스스로 바보가 됨으로써 비난을 자초 합니다. 그 비난에 대해서도 반문 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리가 안나온다면 날도 추운데 나머지목불 마저 장작으로 씁시다” 라며 통념을 다시 따라 가자고 할 뿐입니다.
아이러니는 상대가 말하는 것에 대해 반문하기 위해 자신이 무식하다고 하며 낮추지만 실은 똑똑하다고 믿는 상대를 조롱하고 반박하며 공격하는 방법입니다. 반면 유머는 상대의 비난 마저 그대로 받아 들입니다. “ 똑똑하다 더니 뭐야”가 아니라 “맞아 내가 사실 좀 미련하잖아” 하며 한 술 더 뜨는겁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 상대의 비난으로 부터 빠져 나오기 힘든 늪 속으로 끌고 들어가 같이 죽는 겁니다. 규칙을 너무 충실하게따르는 바보가 되어 그 바보 같은 언행을 하게 하는 규칙을 웃음 거리로 만드는 겁니다. 부조화와 모순을 반박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나 아이러니가 언제나 원리를 적립하는 방법만은 아닙니다. 이 또한 도덕이나 법등 삶을 지배하는 원리에 대해 반문하는 비판의 기술이 될 수 있습니다. 싸드의 작품 소돔 120일은 극단적 폭력을 위해 엄격한 규칙을 만들어 가학하는 자들을 통해 법이야 말로 폭군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미덕의 불운의 주인공 지스티는 더할 수 없이 착한 여성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못된 놈들에게 시달리며 불행을 거듭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싸드는 반문하고 있는 겁니다. 착하게 살다가 이렇게 불행해지는 경우가 비일 비재 한데 정말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
소크라테스가 그 상위의 원리를 제시하기 위해 묻고 있다면 싸드는 그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고 단지 물음만을 던집니다. 이처럼 감춰 놓은 답을 최고 원리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물음을 반복하며 정작 문제가 되는게무엇인지를 드러내려 할 때 아이러니는 비판의 방법이 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아이러니는 문제들을 개선하거나 그 문제들의 조건을 규정하는 데 필요한 미분화들을 수행하는 문제와 물음에 기술이고 이념과 결부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념이 전체를 근거 짓는 원리인지 아니면 답 없는 물음에 반복인지가 소크라테스와 싸드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싸드가 아이러니에 비판적 기술을 보여 준다면 마조흐는 유머의 비판적 기술을 보여 줍니다. 마조히스트란고통에서 쾌락을 얻는 자란 통념을 비판합니다. 쾌락을 추구한다면 고통의 대가로 지불하게 될거야 라는 것이 법의 명령임을 알게 되었을 대 왜 쾌락의 댓가가 고통이냐고 반문하는 아이러니스와 반대로 마조히스트는 쾌락을 위해 고통을 청하는 자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쾌락을 금지 해왔던 그 법의 지고 성이 모든 쾌락에가능성을 부여해주는 양 행동함으로써 처벌이란 위협을 통해 욕망의 충족을 금지 하던 법이 처벌 후에는 당연히 욕망의 충족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법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가 통념에 대한 물음을 통해 올바른 지식, 원리에 입각한 자식으로 밀고 올라가는 상승의 기술이라면 유머는 규칙에 대한 과도한 추종을통해 통념을 역설로 무의미로 내려가는 하강의 기술입니다. 아이러니에게 중요한 것이 물음이라면 유머에게 중요한 것은 과도함이나 가장 같은 방법을 써서 얻어지는 강도 입니다. 당혹으로 밀어 넣는 강도가 없다면 규칙에 복종하는 것은 유머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아이러니는 이념으로 상승하는 물음과 문제의 기술이고, 유머는 개체를 향해 하강하는 감성적 유희의 기술이라고 말합니다. 이로써 아이러니는 유머와 더불어 비판의 방법중 하나가 되고 이념과 강도라는 차이 철학의 핵심 개념과 연결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끝내 양자를 동열에 놓을 수없다고 보는 듯 합니다. 차이와 반복 이듬해에 출간된 의미의 논리에서 그는 아이러니의 모든 형상의 공통된 점은 그것이 특이성을 개체나 인칭에 가둔다고비판합니다. 이데아의 보편성도, 코기토도, 선험적 형식의 보편성도 모두 개체로부터 시작해 개체로 되돌아간다는 겁니다. 반면 유머는 전개체적이고 비인칭적인 특이성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모든 의미가 사라지는역설적 표면을 주파하는 유목적 특이성과 우발점과 손을 잡는 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쉽지요. 가령 수용시설에 개같은 처우에 대해 “내가 개냐?” 라며 항의하는 사람은 나라는 개인에서 시작해 인간이란 보편성으로 상승하고자 하며 이로써 나라는 개인에게 인간다운 처우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아이러니의 방법으로 비판하는 것이지요. 이로써 그는 마땅한 개인적 삶으로 인간적 처우로 되돌아 가려 합니다.
반면 그런 처우에 대해 그래 나는 개다. 그러니 나는 개처럼 행동하겠다면서 소리지르고 규칙을 전혀 모르는듯 행동하고 개처럼 아무곳에서 변을 보고 하는 항의의 방법도 있습니다. 개 라는 개체의 자리로 내려 감으로써 그는 개라는 말로 표현된 전개체적 특이성과 비 인격성, 비 인칭성을 증폭시켜 자신이 속한 장의 특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개나 인간의 통념에 반하는 역설을 통해 무의미의 물결이 범람 하게 하는 겁니다. 그 특이성 인근에 우발점을 불러들여 개와도 인간과도 다른 새로운 삶의 가능 지대를 열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 아이러니와 유머는 상이한 삶의 방법, 상이한 정치의 방법이기도 하다 하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과 목소리를 구별하면서 인간만이 말을 갖고 있다 한적이 있습니다. 항의의 소음을 목소리로 몰아내려는 이런 시도에 대해 자신의 항의가 로고스 임을 주장하는 것이 아이러니의 정치학이라면 자신의 말을동물의 목소리로 끌고 내려가 동물 되기를 하려는 시도는 말과 소리에 새로운 관계를 창안하려는 유머의 정치학 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