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_가타리/개념어(DTG)

12. 크로노스와 아이온

행복메모 2021. 11. 26. 12:53

크로노스와 아이온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입니다. 크로노스가 시간의 신이라면 아이온은 우주의 신, 하늘의 신인데 원이나, 비비꼬인 뱀의 몸으로 상징화 되어 있습니다. 순환의 시간, 되돌아오는 시간을 뜻한다고 합니다. 영원회귀의 시간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의미의 논리에서 들뢰즈는 이둘을 속성을 달리하는 두가지 시간개념으로 재 영유 합니다.

흔히 아이온이 되돌아 오는 시간의 원으로 표상되기에 이에 대비하여 크로노스는 직선의 시간으로 표상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를 뒤집어 크로노스가 원환적 시간이라면 아이온은 직선적 시간이라고 합니다. 니체의 영원회귀를 계절적 순환이나 되돌아 오는 시간으로 해석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독교적 종말 개념이 시간 관념에 끼어들기 이전에 시간이란 계절적 순환 같은 것이었습니다. 달이나 해를 주기를 순환하는 시간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그러니 이건 원으로 표현되는게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에게 아이온은 사건의 시간이고 영원회귀의 반복과 대응하는 시간입니다. 미리 말하자면 반복할때 마다 다른 과거와 미래로 뻗어 나가는 시간의 직선이 아이온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무한히 많은 방향으로 열려 있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사건의 시간이 그것입니다.

크로노스는 크로놀로지가 표현하듯 연대기적 시간, 신체적 시간입니다. 우리가 익숙한 시간이 그것입니다. 사물의 신체 심층을 지배하는 시간입니다. 자연적 시간이 크로노스에는 흔히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개의 시제가 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지나간 현재이고 미래는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되는 현재라는 점에서 현재의 연장 입니다. 그래서 크로노스의 관점에서는 오직 현재만이 시간속에 실존한다고 합니다. 아이온은 사건의 시간, 생성의 시간 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건이란 사물이 아니라 그것의 계열화로 발생하는 표면효과 입니다. 따라서 아이온은 계열화 되는 사물사이 혹은 상이한 사물의 상태 사이에 있습니다. 그 상태 중간에서 한쪽은 과거, 다른 한쪽은 미래로 두방향으로 분할 되는 것이 아이온입니다. 변화와 생성이 발생하는 한 현재 상태 마저도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 하는 시간이 아이온 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빵을 굽다는 밀가루 반죽과 구어진 빵이라는 두 사물 사이에서 진행되는 사건입니다. 한 사물의 두상태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반죽과 빵은 사물의 상태를 지칭하는 명사 입니다. 빵을 굽다는 반죽도 빵도 지칭하지 않습니다. 양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표현하는 동사입니다. 굽기 전에 반죽에도, 구어진 빵에도 시간이 관통하여 흘러 갑니다. 그게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빵을 굽다라는 사건의 시간은 반죽과 빵사이에 있습니다. 반죽은 그 사건 이전에 속하고, 구어진 빵은 사건 이후에 속합니다. 굽다, 구워지다라는 그 사건은 이미 반죽이 아니고, 아직 빵도 아닌 중간 어딘가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굽기를 중단하면 구워지다 만 상태가 새로이 현재 상태로 출현합니다. 다시 굽기를 계속한다면 시간은 그상태를 벗어나며 흘러 갑니다. 그렇게 흘러가기를 중단하지 않아야만, 현재 상태를 벗어나길 멈추지 않아야만, 구워지다 굽다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굽다라고 말할때 굽다만 빵이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굽다만 빵이라고 말할때는 굽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상태를 말하려 하면 사건은 사라지고, 사건에 대해 말하려 하면 현재 상태는 사라집니다. 날아가는 화살이 어느지점에 있는지를 말하는 순간 그 화살은 날지 않고 멈추어 버리게 됩니다. 멈춘 화살에겐 현재만 있습니다. 날아가는 화살에겐 현재가 없습니다. 방금 떠나온 과거와 막 도착하려는 미래가 있을 뿐입니다.

이처첨 아이온은 변화와 생성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 아직 아이온에 대해 충분히 말했다 할 수 없습니다. 아이온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처럼 물리적으로 실행된 사건이 아니라 잠재적인 사건에 대해 다룰때 드러납니다. 아이온이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이고,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은 사건과 대응하는 시간 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들뢰즈의 사건개념이 잠재성과 짝을 이룸을 강조 해야 합니다. 이는 들뢰즈의 사건 개념이 다른 이들과 어떻게 다른 가를 아는데 중요합니다. 사건이란 개념은 대개 현행적인 발생을 지칭합니다. 뉴스나 신문에 나오는 사건들은 모두 현행적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화재가 발생하고 다리가 무너지고 등등 모두 물리적으로 실행된 사건입니다. 시인들에게 오는 시적 사건도 그렇습니다. 시가 시인에게 다가와 손으로 글씨를 쓰게 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철학적 개념에서도 그렇습니다. 사건을 철학적 개념으로 가장 먼저 사용했던 철학자는 하이데거 입니다. 하이데거에게 사건이란 일상적인 삶에 덮쳐와 그동안 존재의 의미를 망각하고 살았음을 경악속에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가령 개발을 위해 파헤쳐진 고향의 산천을 보고 경악하여 하던 일을 접고 다른 삶을 살도록 결단하게 하는 사건,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하이데거에는 덮쳐 오지 않은 사건,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디유의 사건 개념도 마찬 가지 입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사건이란 차라리 이념적이고 잠재적인 것입니다. 이념적이란 말은 신체적이란 말과 대비 되기도 하지만 반복가능한 보편성을 갖고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빵을 굽다, 칼을 갈다 같은 동사는 물론 사랑이나 혁명같은 명사로 표현되는 사건들도 모두 반복 가능한 보편성을 갖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뿐만아니라 옆집 고양이에게도, 시베리아의 늑대에게도 커지다 라는 사건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크게 실패한 사람도 아직 시작도 못해본 사람도 모두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소련이 망한 이후에도 여전히 혁명을 꿈꿀 수 있습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도 실패이후 다시 꿈꾸는 사람도 아직 현행화 되지 않은 사건입니다. 그런 사건을 말한다 함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사건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처음이라면 어떻게 다가올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고 실패했다면 다음엔 다르겠지라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잠재적 사건이란 어떤 조건과 만나는가에 따라 아주 다르게 펼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인에게 찾아오는 시적 사건이나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사건은 유일무이한 고유성을 갖겠지만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건이란 주어를 바꾸어도 반복 가능하고 한사람에게도 반복 가능한 것 입니다. 시인이나 하이데거의 사건이 이미 닥쳐온 사건에 속하다면 들뢰즈의 사건은 기다림에 속합니다.

아이온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중에 하나는 시적 사건이나 존재의 사건처럼 어떤 전면적 변화가 발생하는 어떤 특별한 순간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사건의 시간은 시적 시간도 놀라게 하는 전면의 시간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건의 반복 가능성과 관련된 시간이고 심지어 실행되지 않은 사건에 속하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순간이라 하기도 하지만 그 순간은 자리를 갖지 않습니다. 아이온의 선에서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며 선 전체를 주파합니다. 반복가능성 속으로 기다림 속으로 누군가를 불러 들이는 모든 잠재적 사건의 시간이 순간 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순간은 역설적 심급 내지 우발점이라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이말의 의미는 잠재와의 선을 따라 갈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들뢰즈는 잠재적 사건을 물리적으로 현행화된 사건과 대비합니다. "사건을 고찰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페기(Peguy)의 말을 빌어 이를 각자 '생성'과 '역사'란 개념과 짝을 짓습니다. 현행화란 사건을 따라 가면서 역사속에서의 그것의 실행을 기록하는 과정이라면 잠재화란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 생성속에 자리잡듯 그속에 자리잡는 것이라는 겁니다. 가령 소련이나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펼쳐진 혁명의 과정을 따라가며 기록하는 것이 사건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반면 그런 혁명을 두고, 혁명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물으며 혁명이란 사건의 잠재성으로 다른 순간에 다른 곳에서 펼쳐질 사건들로 밀고 올라가는게,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 생성으로서의 사건속에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재화란 현행화 된것을 필름 되감듯 애초에 출발점으로 되돌아 가는게 아닙니다. 현행화된 사물의 상태로 부터 잠재적인 것으로 올라갈때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전혀 다른 현실 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발점으로 다른 규정 가능성들로 열린 생성의 지대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성의 지대란 동시에 젊어지기도 하고 늙어지기도 하며 사건을 이루는 모든 특이성을 겪어 보는 것이 가능한 곳입니다. 사건을 거슬러 간다함은 혁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속에서 혁명의 관념 자체를 바꾸며 아주 다른 혁명의 가능성들이 분개하는 지점으로 감을 뜻합니다. 혁명에 대한 기존의 의미 모두를 무의미로 되돌기에 수많은 가능한 다른 의미들이 출현하는 지점이 그곳입니다. 혁명에 반한다고 믿던 것들 마저 혁명 속으로 밀려 들어가는 역설적 계열화가 거기서 필요하게 됩니다.

그렇게 현행화 된 역사속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잠재화된 사건속에서는 모든 것이 변합니다. 잠재적 규정의 최소치와 우발점이 연결되면서 모든 사건화를 향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규정된 의미는 수 많은 다른 의미를 함축하는 무의미로, 역설로 되돌아 가고 특이점을 둘러싼 우발점은 모든 사건화를 향한 선을 그릴 수 있게 해줍니다. 사건의 순간이란 역설적 심급이고 우발점이란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따라서 사건의 시간은 사건이 발생하는 현행적 시간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입니다.

모든 가능한 사건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상이한 의미 상이한 방향으로 사건 하나에 동시에 뻗어나가는 시간 그것이 바로 사건의 시간입니다. 의미의 논리에서 아이온이라고 명명했던 이 시간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사이 시간 이라고 명명합니다. 두순간 사이에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건이 바로 사이 시간이다. 사이 시간이란 사이에 속한 시간이고 사이로서의 시간 입니다.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되는 사이로 우발 점이 끼어드는 시간이며 상이한 방향의 선들이 동시에 붕괴되는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 개념에 영감을 준 것은 보르헤스(Borges) 입니다. 보르헤스는 <바빌로니아의 복권>에서 모든 추첨의 단계에 우연을 개입시킬 복권에 대해 말합니다. 가령 상금을 줄 건지, 벌금을 매길 건지, 상금이면 상금을 얼마나 줄건지, 그걸 정하는 사람은 누구로 할건지, 그 사람을 어느 지역에서 뽑을 건지, 그 지역을 뽑을 기준은 무엇으로 할것인지 등등 추첨으로 정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추첨의 횟수는 무한히 거듭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무한히 많은 우연이 영원히 끼어드는 겁니다. 그렇게 우연히 끼어드는 사이가 바로 사이 시간입니다.

아이온은 사이 시간 입니다. 수많은 방향으로 열린 우발점에 따라 다르게 현행화될 사건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이지만 일어날 모든 일들로 열린 시간이고 그 사건들을 암시하는 시간이며 사건들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암시로 남은 사건, 그 암시에 홀린 기다림이 거기에 있습니다. 사건의 철학 그것은 거대한 암시로서의 철학입니다. 철학이란 그런 암시를 담은 개념을 창안하는 작업이라는게 들뢰즈와 카타리의 생각입니다. 현행화를 거슬러 사이 시간속에서 암시의 유혹을 던지는 사건의 개념을 발명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언제나 사이시간이다. 그러니 아이온은 철학의 신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스토아 주의자들은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이어지는 인과의 연쇄를 운명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크로노스는 그 물질적 인과의 연쇄를 지배하는 신입니다. 물론 운명을 거역하는 미친 크로노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온은 미친 크로노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다시 말해 운명을 긍정하면서도 필연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빈칸이 무한히 많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갈라지는 모든 순간들이 사물들에 표면 모두가 다른 사건화를 향해 열린 잠재성으로 암시와 기다림의 사건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렇기에 지극히 낮은 확률에도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 다시한번 하며 주사위를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빵을 굽는 이도 공을 차는 이도 공동체를 만드는 이도 혁명을 꿈꾸는 이도 말입니다. 다른 반복가능성으로 열린 차이가 거기에 있기에 그 주사위 던지기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들뢰즈는 믿고 있습니다. 영원회귀란 그런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