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_가타리/개념어(DTG)

11. 의미와 무의미

행복메모 2021. 11. 23. 07:18

의미란 무엇인가 ? 들뢰즈의 책들이 나오기 시작하던 때는 언어학 내지 기호학의 시대였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 연구에 음운론을 비롯한 구조언어학을 적극 끌어 들였고 이후 언어학은 기호학의 시대를 표시하는 상징적인 깃발이 됩니다. 지식이나 정신 무의식은 물론 패션이나 광고 상품 등 거의 모든 것을 기호와 의미라는 개념으로 다루는 것이 일종의 시대 정신이 됩니다. 언어학적 전회라는 말은 인문학 전체를 덮친 이 거대한 물결에 지칭하는 이름이 었지요 그러나 니체와 스피노자에 매료되었던 들뢰즈는 이러한 시대정신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사유를 시작했고 니체의 말 그대로 반시대적 정신으로 그 시대를 관통해 가며 새로운 사유의 장을 열었습니다. 물론 그 역시 물결을 무시하지 않았기에 기호와 의미에 대해서 쓰고 무의식의 대해 사유했지만 아주 다룬 궤적을 그리지요

기호란 말을 제목에 명시했던 ‘프르스트와 기호들’에서 들뢰즈는 기호에 대해 이렇게 씁니다. 나무들이 내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목수가 된다. 병의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의사가 된다. 여기서 기호는 언어와는 무관하고 언어학의 모델로 의미를 해석하는 기호학과도 거리가 멉니다. 여기서 기호란 나무나 질병의 상태를 좀더 정확하게는 신체 안에 발생하는 어떤 사건을 표현하는 특이한 징후 같은 것입니다. 환자가 입이 마르고 침이 쓰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환자의 신체 상태를 표현하는 기호 입니다. 그말에 언어적 의미를 알아 듣는 것 만으론 그기호를 이해했다고 할 수가 없지요. 정작 의사가 그 기호에서 읽어야 할 것은 환자의 신체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 났는지 입니다. 그게 환자의 말에서 읽어야할 의미 지요. 의사가 아니어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둥에 머리를 부딪힌 친구가 대낮에 별들을 봤어 라고 하는 말을 듣고 어디 별이 있어 라고 반문 한다면 그말의 의미를 전혀 알아 듣지 못한 것이지요.

들뢰즈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 입니다. 그는 이런 의미 개념을 흔히 말이나 명제의 의미라고 생각하는 세가지 개념과 대비 합니다. 대상의 지시, 의도의 표명, 기표의 의미작용이 그것입니다. 첫째 지시 개념에서 말의 의미는 지칭 된 대상이고, 명제의 의미는 그 대상들이 엮여 있는 그림입니다. 이 지시 개념은 대상과 대응 합니다. 둘째 개념은 주체와 대응하는 의미 개념입니다. 즉 주체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바로 말이나 명제의 의미라는 겁니다. 의도 같은게 그것이지요. 셋쩨 개념은 기표의 의미 작용입니다. 이는 앞의 두 개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데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소쉬르에 따르면 양을 표시하기 위해 반드시 양이라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망추나 풍구라고 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망추라고 하기로 했다면 우리는 망추라는 말을 듣고 양을 표상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기호는 자의적이라고 하지요. 양이란 말이 어떤 돌물을 지시하는데 사용되는 것은 약속이나 관습에 따른 것입니다. 그 기표의 의미는 대상이나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기표와의 관계에 따라 결정 됩니다. 가령 영어에서 노벨(NOVEL) 은 스토리나 픽션과의 관계속에서는 문학계의 한 장르를 뜻하지만 신선하지 않음, 오래됨 과의 관계속에서는 참신하고 새로움을 뜻합니다. 이 관계가 달라지면 같은 단어도 다른 외연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예컨대 영어의 머튼은 프랑스어 모통에서 나온 단어인데 프랑스어 모통은 양이나 양고기를 의미하지만 영어의 머튼은 주로 그냥 양고기만을 뜻합니다. 영어에 이미 살아 있는 양을 뜻하는 쉽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지요

구조주의 기호와 의미작용 개념은 이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들뢰즈는 관계속에서 기호의 의미 작용을 보려는 구조주의 입장을 계열적 사고라는 말로 받아 들입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언어적 기호를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아이콘이나 지표(index) 처럼 자의적이지 않은 기호도 있는데 자의적인 기호인 언어만 특권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시 개념은 대상을 재현하려하고, 표명은 주체의 일부를 재현하려 합니다. 언어적 기표는 수립된 의미 작용의 동일성을 통해 이러한 재현을 매개 합니다. 즉 이 세 기호는 재현적 기호의 삼각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기호 개념으로는 나무가 내는 기호, 환자의 몸이 내는 기호를 다룰 수 없습니다. 의도 없이 종종 의미도 모른채 말해 지는 기호를 다룰 수 없습니다. 또한 기호를 써서 표현하려는 것도 다룰 수 없습니다. 기호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것인데 말입니다. (이건 소를 그린 거 잖아 이건 화가를 맥빠지게 하는 말이지요) 아 추워 라고 할때 나도 추워 , 이건 말을 알아 듣지 못한겁니다.

더불어 이 세가지 기호는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을 대상이나, 의도의 재현 , 의미 작용의 동일성 안에 가둡니다. 들뢰즈는 재현적 기호로 부터 의미를 해방시키고자 합니다. 또한 기표는 자의적 이기에 약속이나 관습대로 쓰지 않으면 못 알아 듣지요. 그렇게 기표는 정해진 대로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권력을 행사합니다. 들뢰즈는 이런 기표의 권력으로 부터 기호를 구해내고자 합니다. 기호의 의미를 니체처럼 특이한 징후로서 다루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때 일상적이고 통상적인 기호조차 그때마다 다른 표현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되며 동일한 기호조차 의미의 동일성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명제를 가르는 지시와 표현이야 말로 이원성이라고 하면서 거울 저편으로 가려 합니다. 거울이란 대상을 정확히 비추고 재현히는 세계 입니다. 따라서 거울 저편으로 간다함은 지시의 관계에서 표현의 관계로 매개 없이 즉 표면과 기호작용 없이 이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가령 보들레르의 시선이 노파의 눈에서 수없이 흘렀을 눈물을 포착하게 되었을 때 거울에 비친 흉하게 찌그러진 그 눈뒤에 고된 문턱들을, 수도 없이 넘은 삶의 기호를 보게 됩니다. 이때 눈이나 그 눈에서 흘렀을 수백만 눈물은 통상적인 눈, 눈물과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것과 아주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노파가 살았던 삶의 한 한 표현이 되는 겁니다. 그 말로 포착된 흉하게 찌그러진 모습 자체 또한 하나의 기호입니다. 그 기호에서 시인은 도시의 혼돈 속을 뚫고서 가슴에 피 흘린 삶을 읽어 냅니다. 고통의 되기로 둘러싸인 어떤 사건들을 읽어 내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들뢰즈는 의미는 사건이고, 사건은 특이성이라고 정의 합니다. 시인의 섬세한 감각이 포착한 노파의 눈은 수백만 눈물과 함께 했을 사건들을 담고 있는 기호 입니다. 그가 노파의 눈에 대해 언어적 기호를 썼을 때에도 눈이 송곳으로 찌르는 듯 날카롭고, 번쩍이는 모든 것에 놀라고 웃는 사건들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의미 작용에 따라 사용되는 기표들을 사용했지만 그것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시인이 포착한 어떤 특이성을 표현하는 기호가 된 것입니다.

시 인만 그런 거 아닙니다. ‘대낮에 별을 봤어’ 라는 말의 의미는 기둥과 머리에 충돌이란 사건 입니다. 그말의 의미에는 대 낮도 없고 별도 없습니다. 충돌이 야기한 감응의 특이성이 표현되어 있을 뿐이지요. 입이 마르고 침이 쓰다라는 말의 의미는 말한 환자의 신체에 발생한 어떤 사건을 표현합니다. 환자 자신은 어떤 특정한 의도나 의미를 표명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사에게 그 의미를 묻기 위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의도를 표명하는 기호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에 발생한 사건이 특이성을 표현하는 기호입니다.

기호가 표현이라면 사건은 그것을 통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의미란 이처럼 기호에 의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어떤 기호가 다른 기호와 구별되는 것은 다른 특이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입이 마르고 침이 쓰다라는 기호는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라는 기호와 다른 특이성의 표현입니다. 계열화 되는 이웃항들이 특이성을 규정합니다. 물과 숲에 계열화된 백조와 메마른 도시의 건조한 포장 도로와 먼지에 계열화된 백조는 같은 신체를 갖는 동물일 때 조차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다른 특이성을 통해 다른 사건으로 포착되었기에 다른 의미를 갖는 백조 입니다.

역으로 사건이란 의미 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어떤 사건 인지를 묻는것은 그 일의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길가에 쓰러진 한사람의 신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물 입니다. 그 시체를 두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하고 우리는 묻게 됩니다. 대체 어떤 사건이 일어난 건지를 묻는 물음 입니다. 이는 그의 시체 의미를 묻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이런 물음을 던지는 걸 직업으로 하는 이들이 있지요 경찰이나 기자가 그들 입니다. 물음이 던져지는 것은 문제의 신체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어떤 의미를 표현하는 기호 임을 뜻합니다. 그것은 사건의 특이성을 표현하는 징표 입니다.

그 신체를 둘러싸고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인지를 규정하려면 그 시체 인근에 있었던 것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 시체와 계열화된 이웃 항들을 충분히 찾아내게 되면 거기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규정할 수 있습니다 . 그 처럼 사건의 특이성이 명확히 규정될때 우리는 그 시체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기호의 의미를 쉽게 포착 할 수 있다함은 사건의 특이성을 규정하기에 충분할만큼 계열화된 이웃관계 들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음을 뜻합니다. 사건이 미궁에 빠젔다 함은 이웃항 들이 충분하지 않아서 사건의 특이성을 명확히 규정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하나의 동일한 시체가 얼마나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탁월하게 보여 줍니다. 다양한 사건들은 시체의 의미를 규정할 수 없는 상태로 무의미로 되돌려 놓습니다.

범죄자는 사건의 특이성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웃항들을 감추고 제거 합니다. 혹은 사건의 의미를 오해하도록 이웃 항들을 바꾸어 버립니다. 탐정소설 역시 나중에 반전을 위해 오해하기 쉬운 이웃항들을 이용합니다. 많은 소설들이 사건의 특이성을 포착하는 데 필수적인 이웃항 들을 지워 놓고는 묻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래서 들뢰즈는 소설에서는 모든 것이 이 물음 인근에서 직조된다라고 합니다. 이 물음이 바로 사건화 하는 물음 입니다. 기호에 민감하다 함은 감추어진 이웃항들, 비가시적인 이웃항들을 감지하는 능력이 크다는 것을 뜻하지요. 탁월한 탐정, 뛰어난 의사의 능력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호와 의미에 대한 이런 입장을 재현적 관점과 대비하여 표현적 관점이 라 합니다. 표현 개념에서 다루었듯이 이러한 관점은 재현과 달리 삼항성 갖는다고 하지요. 명제나 기호가 표현이라만 의미란 이를 통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하나 추가 되어야 하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시체 인근에서 발견된 피묻은 칼을 죽은 이를 둘러싸고 발생한 사건을 표현하는 또하나의 기호 입니다. 그것이 시체와 계열화 되면서 그 사건은 칼에 의한 살인 이라고 규정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 기호들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근에서 독약이 든 병이 발견 되었다면 독살의 가능성이 있지요 칼에 의한 살인이라는 규정을 무력화 되고 시체는 칼과 독약사이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호로 되돌아 갑니다. 하나의 의미가 지워지며 무의미로 되돌아 가는 겁니다. 여기서 시체를 둘러싼 하나의 동일한사건이 칼, 독약 등의 기호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 말고도 다른 의미를 갖는 다른 표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가능한 사건들이 시체를 둘러싼 하나의 동일한 사건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걸 생각하지 않고 섣불리 사건의 의미를 규정해 버리면 수사에 실패하기 십상이지요

자기를 표현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중요 합니다. 자기를 표현하는 것 즉 다양한사건 등 상이한 의미들로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동일한 사건은 다양한 규정 가능성을 갖는 미 규정적 잠재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것으로서의 사건은 의미가 아닌 무의미와 대응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무의미는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발생합니다. 언어도 그렇습니다. 누이스 캐롤은 스네이크와 샤크를 합쳐서 스낙을 만들었고, 제임스 조이스는 케이어스와 코스모스르 합쳐서 카오스모스라는 말을 만들었지요 두말 모두 상이한 의미가 공존하기에 무의미한 말입니다. 의미 과잉으로 무의미한 말이지요 그렇기에 상이한 두말과 다른 많은 의미 열려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무의미는 수많은 의미로 펼쳐질 수 있는 잠재성을 뜻합니다. 무의미는 아직 의미가 채워지지 않은 빈칸이지만 실은 많은 의미들로 채워진 빈칸 입니다. 가능한 이 의미들로 부터 우리는 하나의 의미를 끄집어 냅니다. 어떤 사물을 이웃항들과 계열화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열화 하는 방식은 사실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양식이나 통념에 따라서 계열화 하기 때문입니다. 빵을 든체 누군가에게 쫓기며 달리고 있다면 도둑질이 분명하다고 믿지요.

양식을 뜻하는 프랑스어 보쌍스(bon sens)는 좋은 방향을 뜻하기도 합니다. 계열화해야할 좋은 방향을 양식이 제공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계열화 가능성이 넓게 열려 있지만 우리는 쉽게 양식에 따라 계열화 해버립니다. 가령 붉은 깃발과 시위대가 인근 있으면 얼른 그것을 계열화 하여 깃발든 사람을 의미하는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합니다. 모던 타임즈의 유명한 한장면에서 채플린은 그 붉은 깃발을 한편으로 시위대와 다른 한편으론 철근의 회의실을 트럭과 계열화 함으로써 그 의미를 지워버럽니다. 상이한 방향의 계열화를 중첩시켜서 깃발의 의미를 무의미로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양식적 계열화로 인해 놓치고 있는 다른 의미들로 우리의 눈을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양식이나 통념에 반하는 이런 계열화를 통해 의미를 무의미로 되돌려 놓는 것을 들뢰즈는 역설이라고 합니다. 반하다(against)를 뜻하는 말, 파라(para)를 통념을 뜻하는 말 독사의 말을 붙여 만들어진 말이 역설이지요. 양식이나 통념은 우리로 하여금 흔히 하던 대로 계열하도록 하는 권력을 장착하고 있습니다. 역설은 이 권력을 무력화 시켜 통상적인 의미를 지워 무의미로 거슬러 가게 합니다. 거기서 다른 의미를 향한 새로운 계열화를 시도하게 합니다. 기호나 표현의 동일성의 권력에서 벗어나 다른 의미를 향해 가도록 촉발 합니다. 어떤 기호에서 다른 의미를 향한 잠재성을 놓친다면 우리는 양식의 권력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사건의 범인을 놓칠 뿐 아니라 엉뚱한 사람에게 혐의를 뒤집어 쓰게 될 것입니다. 탐정 소설에서 평범한 경찰들이 흔히 하듯이 말입니다. 의미 이상으로 무의미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