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메모 2021. 11. 9. 22:59

차이란 무엇일까 ? 한마디로 같지 않음 이다. 같음의 반대이자 동일성의 반대말이다. 차이란 동일성의 뒷면이다. 차이 없는 동일성은 없고, 동일성 없는 차이는 없다라고 한다. 로마인 폴리니우스는 말했다. "세상에 똑같은 두장의 나뭇잎은 없다." 어떻게 똑같은 두장의 나뭇잎이 있을 수 있을까. 색이든 형태든 어딘가 다르다. 세상에 똑 같은 두사람은 없다. 쌍둥이도 똑 같지 않다. 또한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도 같지 않다. 얼굴도 생물학적으로 같지 않다. 6개월이 지나면 뼈속까지 신체의 거의 모든 세포가 바뀐다. 10년전의 나, 1년 아니 어제의 나와도 나는 다르다. 조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지 않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차이 밖에 없다.

그럼 동일성은 어디에 있을까 ? 동일성은 정체성이라고도 번역되는 identity를 지시하는 말이다. 엄격하게 작년의 나와 어제의 나는 다르지만 ID카드를 통해서 동일한 나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 사고를 냈을 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렇게 하려면 그 동안의 차이를 지워야만 한다. 오직 세상에는 차이만이 존재하지만, 차이를 지워 비슷한 것 몇개만 남길때, 필요한 것만 남기고 다른 차이는 모두 지울 때 동일성이 만들어 진다. 은행 나무에 있는 100장의 잎이 모두 다르지만, 필요한 특징만 남기고 차이를 모두 지울 대, ‘은행잎’ 이라는 하나의 말로 부를 수 있게 된다. 비슷한 것을 재 포착할 때 우리는 반복을 발견한다. 반복을 통해서 비슷한 일을 예측 한다. 예를 들어 어제도, 오늘도 해가 떴고 내일도 해가 뜰 것이다. 우리가 반복을 발견할 때 질서를 인식한다. 저별이 올해에도 저 자리에 있네, 작년 이 맘때도 저기 있었는데 !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를 보게 된다. 그러나 모든 반복에는 차이가 숨어 있다. 매일 해가 뜬다지만, 매일 다르게 뜨고, 매년 장마가 오지만 매년 다르게 온다. 그 처럼 반복되는 것에서 차이를 지울 때, ‘아침’ 이나 ‘장마’의 동일성이 탄생한다. 모든 반복은 다른 반복, 차이의 반복인데, 그 반복되는 것에서 차이를 지워 차이 없는 반복으로 만들때 동일성이 탄생한다. 동일성은 사실 가상이다. 차이를 지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이다.

동일성은 공유된다. 말하고 행동하는 데 필요한 것이 동일성이다. 공유된 동일성은 현실적인 힘을 가지며, 역으로 차이를 지우는 권력을 행사한다. 기존질서를 무너뜨린다는 불안, 내가 하는 것과 다른 것에 대한 불편함일 수 있다. 가령 남성으로 분류되는 사람이 ‘작은’일로 자주 울면 ‘사내 자식이 질질 짠다’고 비난 받게 되고, 20년 넘게 ‘울면 안돼!” 다짐하며 살다 보면 남다른 감수성은 ‘남성적’ 감수성이 되고 만다. 사랑의 동일성은 이성간의 호감에서 발생하는데 남자가 남자를 사랑한다고 ! 비운의 컴퓨터 천재 튜링은 화학적 거세 처분을 받았고 그 모육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여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걸 받이들일 때 조차, 펨과 부치로, 또 다시 여성과 남성이란 개념에 맞추어 동일화 한다. 사실 여성의 남성적인 면이 아니라 영성적인 면아, 혹은 아이같은 면이, 혹은 동물적 야성이나 식물적 포용력이 좋아서 그런 것인데... 민족, 학생, 부모의 동일성이 다 그렇다. ‘정상성’이란 차이를 지우려는 동일성의 권력이다.

그러나 동일성의 사유를 너무 졸로 보면 안된다. 그 사유 역시 차이를 구별하는 게 중요함을 압니다. 같은 인간이지만 한국인과 일본인이 다르고, 같은 동물이지만 인간과 개가 다르고, 같은 반려 동물이지만 개와 고양이가 다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차이를 종차라고 한다. 종간의 창이, 종적인 차이라는 뜻이다. 종속과목강문계라는 분류학이 이러한 종차로부터 나온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 동성애자는 동성 파트너를 사랑하는 사람 이런 종차를 표시한다. 이는 사람 동물, 사람 이란 상위의 동일성안에서 인간, 동성애의 ‘종적’ 차이를 다루는 것이다. 그 동일성 안에 차이를 포섭하는 것이다. 종차 대신에 대립으로 다루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 생명과 기계, 적과 동지의 대립 이다. 종차가 비슷한 것 나누어 묶는 방법이라면 대립은 차이를 최대한 벌리는 방버이다. 대립역시 차이를 동일성에 가둬 버린 결과를 가져온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이 나서는 순간, 여성 안에 있는 수많은 차이들은 지워지고, 적과 동지로 대립되는 순간 모든 이들은 둘중의 하나로 환원된다. 요컨데 동일성의 사유도 차이를 인정하고 개념화하지만, 모두 동일성의 보충물로 다룬다는 것이 한계이다.

차이를 동일성안에 가두는 이유는 차이만으로는 정신없는 무질서를 유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차이의 철학에 대한 가장 흔하고 가장 바보 같은 오해는 단지 차이만이 존재 한다고 주장하거나 차이만 예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차이의 철학은 차이를 동일성의 쫄따구 처지에서 해방시키려는 기획이다. 차이만이 존재한다라는 명제로는 이를 이룰 수 없다. 동일성의 굴레에서 차이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만들어진 차이’가 아니라 ‘만들어내는 차이’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사물이나 상태의 성질들 간 차이로 보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차이, 만들어진 차이를 보는 것이다. 비교에 의해서 동일성과 차이를 분류하는 것은 만들어진 차이를 비교에 의해 구별되는 인식론적 차이로 보는 것이다. A와 B의 마이너스 차이로 보는 것이다. A는 있으나 B는 없는 것 ..차이의 철학이 주목하는 것은 ‘만들어 내는 차이’, 어떤 것을 ‘다르게 만드는 차이’ 생성적 힘으로서의 차이고 ,비교 이전의 존재론적 차이다. 같은 사람을 다르게 만드는 차이 쌍둥이 마저 다르게만드는 차이가 있습니다. 수정란의 발생조건의 차이가 최소의 차이라면 누군가에게 다가온 인물은 결정적 인물은 최대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사이에는 수많은 차이들이 있을 수 있다. 생각을 바꿔주는 책,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마이크도 차이를 만든다. 이런 차이 만들게 책이나 마이크에 결합시켜주는 것이 일종의 사건이다. 누군가 밖에서 온것과의 만남,접속을 통해서 A+B로 표시할 수 있는 A, B의 만남, 플러스로 표시되는 접속, 그것이 바로 만들어 내는 차이, 차이를 만드는 차이이다. 만들어내는 힘으로서의 차이에 주목한다. 차이의 철학은 세상속의 차이를 본다기 보다 차라리 차이에 의해 세상을 본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모든 것은 차이에 의해 만들어 지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려는 것이다. 들뢰즈가 미분의 수학을 끌어들여 변화하는 순간의 최소 차이, 변화를 만들어 내는 최소 차이인 미분적 차이를 보려는 것은 이때문이다. 모든 변화와 생성의 근저에 있는 최소 크기의 차이, 그게 바로 미분적 차이이다. 미분적 차이를 본다 함은 정지된 듯 보이는 것 속에서도 동일해 보이는 상태에서도 변화, 변화 시키려는 힘을 포착하는 것이다. 무한소 크기로 이웃한 두점을 ‘연결’하는 직선의 기울기인 미분계수, 미분적인 스케일에서의 이웃관계가 바로 미분적 관계이다. 들뢰즈는 이를 변화/생성을 사유하는 개념으로 발전 시킨다. 동일성도 변화도 모두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차이의 철학은 모든 존재자 속에 있는 생성의 힘이 차이임을 강조한다. 미분적 차이는 ‘만들어내는 차이’를 생성을 사유하는 근본적인 자리에 위치한다. 이로써 차이는 가장 ‘보편적인’개념이 된다. 가장 구체적인 지점, 한순간의 개체들 마저 다르게 만드는 차이이다. 강도가 바로 그런 사태를 나타낸다. 차이의 철학이 주목하는 개념이 강도이다. 쌍둥이를 다르게 만드는 발생조건의 작은 차이, 사실 강도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수정란 표면에 가해지는 자극의 강도를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다. 모든 만남은 강도를 갖는데, 강도가 달라지면 그것만으로 아주 다른 만남이 된다. 호감의 강도가 어떤 문턱을 넘으면 헤어져도 굉장한 강한 감응으로 남을 수 있다. 격려의 손길로 어깨를 두드리는 일이 있지만 그 강도가 ‘도를 지나치면’ 격려하는 건지 때리는 건지 알 수 없게 된다. 강도는 동일해 보이는 것을 그 내부에서 초과하는 힘이다. 강도는 같다고 생각했던 걸 아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힘이다. 소설 <폭풍의언덕>에서 히스클리프처럼 사랑의 강도가 도를 넘으면 사랑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미친 사랑’이 되기도 한다. 동일성의 권력을 초과하는 차이 그게 바로 강도이다. 익숙하고 상투적인 것을 괴물로 바꾸는 것, 그 괴물 같은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차이의 철학이 하려고 하는 것이다.

 

 

차이 vs. 동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