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메모 2022. 1. 18. 01:18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이데올로기에 속박된다’든가 ‘그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처럼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본래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19세기 초에 ‘관념학’ 이란 의미로 생성된 것이다. 즉  ‘형이상학’에 대비되는 과학이론으로서의 ‘관념학’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최초로 이데올로기란 용어를 부정적으로 상요한 것은 나폴레옹이었다고 한다. 그는 관념적인 학자들의 현실과 동떨어진 사고상식을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했다. 현재와 거의 비슷한 의미로 상용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서 최초로 정식화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당시 철학자들, 예를 들어 포이에르바흐와 바우어 등의 철학을 가지각색의 이데올로기(허위의식)로 비판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단순한 ‘허위의식’으로만 받아들이면 ‘허위의식’에 대응하는 ‘올바른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 되며, 어느 쪽이 올바른가 하는 이른바 이데올로기 투쟁에 빠지게 된다. 냉전의 종언을 ‘이데올로기의 종언’으로 받아들인 역사관도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그것이 현실생활의 여러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현실적인 여러 관계(‘소통’이나 ‘생산’)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허위의식’에 대해서 ‘올바른 의식’을 대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런 ‘허위의식(환상)’을 탄생시킨 구체적인 조건들을 탐구할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사고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 부터 <독일 이데올로기>를 독해하는 과정에서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경제적인 과정에서만 이데올로기의 형성 원인을 구한 데 반해, 사회의 가지각색의 일상적 실천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형성을 발견해 낸 것이다.  “무릎 꿇고 기도 하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라는 파스칼 말 인용한다.  제도화된 물질적 장치와 거기서 행해지는 특정한 방식의 실천을 통해 존재하고 작동한다.  교회(물질적 장치)에 나가서 손을 모아 기도(실천) 해야 신(이데올로기)을 믿게 되는 것처럼 이데올로기 역시 마찬가지다.  가정, 학교, 직장, TV 같은 제도화된 물질적 장치에서 그에 합당한 실천을 함으로써 이데올로기가 형성된 것이다.  인간이 사회에서 태어나고 세계와 관계하는 이상, 이데올로기의 존재는 불가결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의식과 관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함으로써 발생하는 상상적인 표상이자 그 상상적 표상을 형성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고 그결과로서의 개인(주체)을 형성해내는 사회구조 그 자체도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p.189,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 사상)


표상은 감각적으로 외적 대상을 의식상에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단어를 보고 의식상에 떠올리는 것이다. 감각 지각에 입각하여 머릿속에 재현시킨다. 어떤 행동이나 판단이든 특정한 표상과 함께 한다고 한다. 이를 ‘표상 체계’라고 한다. 동일한 경험이나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표상체계가 유사한 구조로 되어있다. 가정, 학교, 직장과 같은 제도적 장치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동일한 표상 체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다르게 표현하면 ‘세상 사람들의 표상체계" 라고 한다.  "우리가 이데올로기에서 발견하는 표상, 즉 세계에 대한 상상적 표상 속에서 반영된 것은 인간들의 존재 조건 들이고 따라서 그들의 현실 세계이다". 즉 우리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표상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 한다고 주장 한다.  이데올로기 장치는 개인(주체)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가 현실에서 기능하는 사회공간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억압적인 법과 정치제도 등의 국가 장치만이 이데올로기 장치는 아니며,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제도를 이데올기 장치로 보는 것이다. 학교, 종교단체, 매스미디어, 각종 조합 등 모든 제도가 이데올로기 장치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런 제도 속에서 일상적인 실천을 통해 우리의 몸에 이데올로기를 각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를 당연시하고 이것 외에는 삶의 대안이 없는 것처럼 내면화 한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상식, 즉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정의하고 감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식은 일상의 모든 영역을 결정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상식의 명령대로 살아간다. 이데올로기가 그러한 역할을 할 때 이데올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내면화 과정으로 호명을 이야기 한다. 다양한 이데올로기에 호명된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호명으로 인해 한 개인의 생각이나 판단, 행동에 이데올로기라는 무의식적인 표상 체계가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호명은 특정한 사회적 구성이 주체를 지명하는 비강제적 과정을 가리킨다. 존재의 실제 조건에 개인이 갖는 상상적 관계다. 호명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을 주체로 오인한다. 자신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자신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이데올로기 조건에서 개인들은 사회적으로 생산된 가상 재현을 그들의 실제 자아로 오인한다(교양인을 위한 철학 사전).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아주 흔한 경찰의 일상적인 호명과 같은 유형 속에 그것을 표상할 수 있다. “헤이, 거기 당신!”만일 우리가 상정한 이론적 장면이 길거리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호명된 개체는 뒤돌아볼 것이다. 이 단순한 180도의 물리적 선회에 의해서 그는 주체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호명이 ‘바로' 그에게 행해졌으며, '호명된 자가 바로(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과 삶, 학교와 직장, 사회와 역사에 대하여 그 근원을 캐묻고 본질을 파악하기 시작하면  우리에게 강요하는 이데올로기(허위의식)에 대한 각성이 가능하다. 당연하게 받아 들이는 상식을 의심해야 한다. 그 것은 단지 허위의식에 눈을 뜨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제도 분석을 통한  이데올로기의 형성과정을 분석하고, 실천(행위)의 수준에서 사회적 관계들을 변화 시켜야 한다.  나를 다르게 불러줄 사람을  찾고 그들과 연대하여 호명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허상을 벗겨내고 자유롭고 당당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기 보다,  세계와 관계함으로써 발생하는 상상적 표상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 사상>(빌리스 듀스 지음, 남도현 옮김, 계마고원, 2003년) 

 <교양인을 위한 인문학 사전>(이안 뷰캐넌, 윤민정/이선주 옮김, 자음과 모음, 2017년 )

 <개념어 사전>(남경태, 들녘, 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