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개인
언어의 범위만큼 생각할 수 있다.
행복메모
2019. 3. 6. 00:28
언어의 범위만큼 생각할 수 있다.
가끔 이동중에 인문학 강의를 들을 때가 있다. 헤드폰을 쓰고 핸드폰과 블루투스로 연결 시킨다. 겨울에는 헤드폰이 귀마게 역할까지 충실하게 해 준다. 거리를 걸을 때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드폰은 지하철이나 버스로 먼거리 이동중에만 사용 한다. 평일에는 퇴근 시 보다는 출근시 자주 듣는다. 들을 수 있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업무로 에너지가 소진되면 퇴근 시간에는 헤드폰을 꺼내는 것도 귀찮다. 강의를 들어도 들어 오지 않는다. 특별하게 주제를 선정하고 듣는 것이 아니다. 그때 그때 관심 분야에 따라 주제가 달라 진다. 이번에는 소쉬르의 언어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흔히 언어(말,글)가 사물을 지칭하거나 ‘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인간이 실재하는 사물을 머릿속에서 의식하고, 그 의식된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먼저 실재하는 사물이 있고, 그 다음에 이 사물에 대한 개념이 있다. 그 다음에야 이 사물의 개념을 표현하는 언어가 있다는 생각이다. 대부분은 우리는 언어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즉 의식이 언어에 선행한다고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소쉬르는 언어의 자의성을 강조하면서 사물과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언어 체계를 상정할 경우에만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의적인 기호 체계를 통해서 사물과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언어가 의식에 선행하는 것이다.
언어의 자의성의 의미는 기표(청각 이미지)와 기의(개념)가 결합되는 방식이 자의적임을 의미하다. 이 둘 사이에 그 어떠한 자연적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소쉬르가 자의성을 언급하는 이유는 기호의 정체성이 기호 바깥의 다른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에게 있어 기호는 오직 그것 이 속하는 기호체계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즉 기호는 존재하기 위해 그것 외의 다른 것들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그것 바깥의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자율적인 것이다. 쉽게 표현해 ‘떡’과 '실제 떡' 사이에는 어떤 유사 관계나 일치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즉 '실제 떡'을 '땅' 또는 '띵' 이라는 언어(기호)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언어는 하나의 관념을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사물과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기표와 개념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언어 기호의 정체성은 외부의 사물과는 상관없이 자율적으로 획득되는 것이라고 한다.
언어가 의식에 선행에 한다는 것은 우리는 언어의 틀로서 세상을 경험하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에스키모인과 우리가 눈에 대한 인식이 틀리는 다는 것이다. 에스키모인의 언어에는 눈의 종류가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 한다. 눈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이름이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눈 종류의 이름만큼이나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언어에는 의성어가 발달되어 있다. 발달된 의성어로 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방에서 여러사람이 누워서 잘때 젖먹이 아이는 ‘색색’, 유치원다니는 아이는 ‘콜콜’, 아버지와 어머니는 ‘쿨쿨’이다. 서양인들은 어른이나 그들의 숨소리가 그저 ‘제트(z)”로 들릴 뿐이다.
언어가 자의적이라고 하면 하나의 기호는 어떻게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소쉬르의 대답은 ‘차이’이다. 소쉬르에게 있어 기호의 의미는 ‘가치’에 서 유래하며, 가치는 기표들 간의 차이-관계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기호의 의미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기표들 간의 차이 관계이다. 즉, 개념적 의미는 기표와 기의 간의 지시관계에서 성립하는 반면에, 가치는 기호체계 안에서 기호들이 서로간에 맺고 있는 차이 관계에서 성립한다고 한다. 결국 개념적 의미(기의)를 최종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바로 차이이다. “떡”은 “빵”도 아니고, “밥”도 아니고, “과일”이 아닌 것이다. 그들간의 차이를 규정하는 것이다. 소쉬르의 기호의 자의성에 대한 주장은 바로 기표들 간의 차이 관계라는 생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차이는 하나의 언어 단위에 부차적으로 부여된 성격이아니라 차이가 기호의 가치를 규정한다 말한다.
소쉬르는 제네바에서 파리로 향하는 오후 8시45분 에 출발하는 기차의 예를 든다. 오늘 오후 8시45분에 출발하는 기차(기호)는 어제 오후 8시45 분에 파리로 출발한 기차(기호)와 같은 기차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기차들을 같은 기차들이라고 말한다. 왜 같다고 여기는 것일까 ? 오늘 오후 8시45분에 파리를 향해 출발하는 기차는 다른 시각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기차들(다른 기표들)과 비교해 볼 때 어제 오후 8시45분에 파리를 향해 출발했던 기차와 같다는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다. 소쉬르는 기차의 예를 통해서 하나의 사물이 어떻게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기차의 예가 말해주는 것은 결국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그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 관계하는 체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쉬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물의 참된 의미는 사물 자체의 속성과 기능에서가 아니라, 기호의 체계 안에서 기호들이 서로 간에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실재는 기호로서, 언어로서 실재하게 되었다. 물론 이 말은 언어 외적인 실재가, 언어화되지 않은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것은 단지 언어와 동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언어 이전의 실재는 우리에게 있어 무의미 하다는 것을 말한다. 애초에 우리가 인식할 수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적어도 인간에 의해서 표현되고 의미를 갖는 실재는 언어적 기호에 의해 형성되고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말한다. 세계 경험의 비밀은 의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속에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범위 만큼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