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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태의 스토리 철학_욕망에 대하여

행복메모 2021. 11. 14. 11:52

 

요즘 '욕망'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한다.  뜻을 말하라고 하면 원하는 것, 바라는 것, 결코 채울수 없는 것으로 이야기 한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 누으면 편히 잡고 싶다. 욕망은 끝이 없는 결여라고 생각 했다. <노마디즘1>에서는 욕망을 생산이라고 한다. 의미가 쉽게 다가 오지 않아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18>을 펼쳤다. 이야기와 함께 개념어를 쉽게 설명한다. 요즘 고 남경태 작가의 역사책과 철학책이 끌린다. 다른 책에 비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 한다. 욕망은 맹목적이며 무의식적인 흐름이라고 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다. 접속과 배치를 바꾸면서 욕망의 흐름을 조정할 수 있다고 한다. 욕망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공부한다.

"욕망의 흐름 앞에 무릎을 꿇고 포로가 되면 광인이 되고, 욕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타고 장벽을 돌파하면 시인이 된다."

합리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감정이나 욕망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다. 이성reason은 이유라는 뜻도 함께 가진 것에서 알 수 있 듯이 인과율을 중시한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같은 원인은 같은 결과를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은 예측 가능하고 합리적이다. 이 합리성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자연과학이 발달했다. 그런데 감정이나 욕망은 인과율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특히 감정 중에서도 욕망은 이성처럼 밝고 깨끗하지 못하고 어딘가 지저분하고 끈적끈적한 이미지를 준다.

"뭔가를 하고 싶다"는 게 욕망의 본질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은 것처럼 욕망에도 인과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유 없는 욕망도 얼마든지 있다. 배가 고플 때 밥 대신 빵이 나 스파게티를 먹고 싶을 수도 있다. 배가 고프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배가 고프지 않은데 뭔가 먹고 싶을 수도 있다. 이유가 있다 해도 이성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이유일 수도 있다. 햇볕이 너무 따가워 살인을 저지른 '이방인'의 뫼르소에게 햇볕은 살인의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다. 이성이 인간의 다른 모든 속성보다 부각되었던 계몽주의 시대에는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욕망이 금기시 되었다. 계몽주의 철학은 인간에게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 고, 인정하더라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려 했다. 이런 지적 추세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것은 낭만주의 시조였다. 장 자크 루소 같은 반성적 계몽주의자들이 제창한 낭만주의는 이성을 만능의 무기로 내세우는 풍조에 맞서 감정과 열정을 자연스러운 인간적 속성으로 간주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의 모토는 이성에 기반을 둔 문명에 던진 도전장이었다.

그러나 합리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싹튼 낭만주의는 감정, 특히 욕망을 다룰 만한 이론적 기반이 취약했다. 비록 엄격한 합리주의는 거부했지만 낭만주의자들에게 욕망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주제였다. 그들은 욕망을 열정으로 해석하는 정도 이외에 다른 해석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욕망을 체계적으로 다룬 것은 철학이 아니라 경제학이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을 추구하는 욕망이 자본가의 심리적 성향이 아니라 마치 생명을 지닌 별개의 생물처럼 객관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욕망은 낭만주의적 열정과 확연히 구분된다. "자본가가 존경을 받는 것은 자본의 인격화라는 자격 때문이다. 자본가는 수전노처럼 절대적인 치부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수전노에게는 그 욕망이 개인적 열정으로 나타나는 데 비해 자본가의 경우에는 사회적 메커니즘의 작용으로 나타난다(자본 가는 그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하나의 나사에 지나지 않는다).…자본가의 모든 행동은 자본의 기능에 불과하다."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 철학에서 욕망은 도덕적으로도 문제시 되었고 인식론적으로도 철학의 범주 안에 들지 못했 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욕망을 자신의 이론 체계 안에 포함시킬 뿐 아니라 주역으로 등장시킨다. 자본가의 욕망은 단지 자본가가 가진 여러 가지 속성들 중 하나(예를 들면 탐욕이나 욕심)가 아니라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욕망에 관한 새로운 입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는 현대 철학의 선구자다.

마르크스가 욕망을 새로이 바라보는 관점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이성만이 아니라 욕망도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다. 오히려 이성보다 욕망이 더 인간적인 측면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계몽주의의 정점인 19세기 자유주의 사상은 도덕철학을 앞세워 욕망을 부정하려 했으나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외면한 결과다. 귀족의 살롱에서 탄생한 철학적 담론과 자본주의 초창기 런던의 더러운 뒷골목에서 탄생한 철학적 담론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욕망을 새롭게 조명하는 현대 사상의 흐름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이어받는다. 그들은 욕망 에 대한 전통철학의 부정적인 견해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성의 관점에서 보면 욕망은 결핍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게 뭔지 고민하듯이, 욕망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결핍이 없는 존재는 욕망하지 않는다. 또한 전통적인 견해 에 따르면 욕망은 뭔가를 소비하려는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식욕, 성욕 같은 본능적인 욕구에서부터 물욕, 출세욕, 권력욕 등 에 이르기까지 욕망의 여러 형태들은 모두 뭔가를 소비하고 사용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욕망은 결핍도 아니고 소비도 아니다.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며, 소비하는 게 아니라 생산한다.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가 말한 '생산하는 자연'의 개념을 차용해 그들은 '생산하는 욕망'이라는 개념을 만든다. 여기서 생산한다는 동사에는 목적어가 없다. 특정한 대상을 생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욕망은 끊임없이 뭔가를 생산하는 속성을 가진다는 의미다. 그런 뜻에서 욕망은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에너지이며 흐름이다.

욕망은 흐른다. 흘러서 차고 넘친다(그런데 결핍이라니!) 욕망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므로 욕망의 주인이나 주체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욕망은 어느 누가 소유한 성질이 아니다. 하지만 욕망이라고 하면 당연히 주체와 대상을 떠올리게 되지 않는가? 욕망은 "누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뜻이 아닌가? '시험을 앞두고도 밤새 게임을 즐기고 싶은 수험생의 욕망', '틈만 나면 책상 다 리를 물어뜯고 싶은 강아지의 욕망',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돈을 벌고 싶은 욕망'이 욕망의 일반적인 양태가 아닌가?

욕망을 의식의 속성으로 보면 그렇다. 욕망을 결핍이나 소망으로 이해하는 견해는 모두 욕망을 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 욕망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다. 욕망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물처럼,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르는 전기처럼 무작정 흐른다. 심리적인 요소라기보다는 물리적인 요소에 가깝다.

자본가가 자본을 확대재생산하려는 노력은 언뜻 보면 의식적인 활동으로 생각되지만, 실은 자본의 논리에 종속된 결과다. 자본은 달리지 않으면 넘어지는 자전거처럼 증대하지 않으면 유지 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자본의 증식은 자본가의 욕망이 아니라 자본의 욕망이다("자본가의 모든 행동은 자본의 기능에 불과하다"

욕망은 특정한 주체와 대상이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고 기능 한다. 전통 철학에서는 욕망을 인격적이고 의식적인 속성으로 여겼기 때문에 욕망을 설명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설명과 이해의 주요 수단인 이성 자체가 인격적이고 의식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욕망은 비인격적이고 무의식적이다. 욕망은 끊임없이 뭔가를 생산하지만 그것은 의식적이고 합리 적인 생산이 아니다. 욕망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 같다. 늘 움직이지만 움직인다는 것만 알 뿐 방향은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인류 사회는 역사적으로 항상 욕망을 통제하고자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존립할 수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통제 방식에 따라 원시사회, 고대사회, 자본주의사회를 구분한 다. 마지막 단계인 자본주의는 욕망의 흐름을 한편으로는 방치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통제하는 이중적인 방식을 취한다. 자본주의는 노동력과 소비자를 다원화해야만 성장할 수 있지만 동시에 화폐자본으로 모든 것이 집중되어야만 하는 체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분열증이 자연스러운 사회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분열증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가속화시켜야만 자본주의를 해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광인과 시인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욕망의 흐름 앞에 무릎을 꿇고 포로가 되면 광인이 되고, 욕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타고 장벽을 돌파하면 시인이 된다.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18)